"칼텍과 같은 대학을 대한민국에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선험자로서 여러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키큰 칼텍 재정담당 부총장의 안면에 장난스런 웃음이 번졌다. 농담이 지나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세계 과학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세운 칼텍의 헤드 속으로 불쑥 쳐들어 온 키 작은 동양인이 대뜸 칼텍과 같은 대학을 세우고 싶다고 했으니, 뭐 이런 당돌한 황색인이 다 있나 싶었는지 모른다. 박태준은 포항제철의 현황부터 개괄적으로 들려주었다.

"제철공장을 만드는 일과 이런 대학을 세우고 성공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입니다." 칼텍 부총장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박태준은 더 차분해졌다. "단순히 제철을 위한 대학을 세우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한민국도 더 늦기 전에 과학과 공학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기업 차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박태준은 과학과 공학의 기초가 형편없는 한국의 현실을 솔직히 털어놓고 자문을 구했다. 매우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대기업이 먼저 21세기를 내다보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는 그의 오랜 신념이기도 했다.

'박태준 평전'에 소개하고 있는 고 박태준 포스코명예회장이 1985년 5월 '칼텍'이라 불리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CIT)을 찾아 대학 설립의 자문을 구한 일화다. 박태준이 세계적인 대학 설립의 뜻을 세운지 꼭 한 세대 만에 포스텍이 그의 포부대로 세계적인 대학의 반열에 올랐다. 포스텍이 세계의 대학들을 대상으로 하는 '차세대 세계적 수준의 대학이 될 가장 잠재력 있는 대학'에 3년을 내리 1위로 뽑혔다. 권위의 영국 더 타임즈가 선정한 '설립 50년 이내 세계대학평가'에서다. 이는 역사가 오랜 명문 대학이 우세할 수 밖에 없는 평판도의 비중을 줄이고 교육과 연구의 실질적 수월성에 가중치를 둔 것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 더 타임즈 랭킹 에디터 필 베티는 "포스텍은 이미 수 세기 동안 자리 잡은 대학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경쟁하고 있다"면서 "이 대학의 성공은 선견지명을 가진 리더십의 중요성을 증명한 것"이라 했다. 고 박태준 명예회장이 꿈꾼 포스텍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 배출도 멀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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