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비극의 눈물 옹달샘에 고여 그 샘물로 영혼을 씻어낸다

안영환 편집위원

6월은 호국의 달이다. "가세가세 건너가세 건너편에 닿으니 깨달음이 있네. 아, 기쁨이여"(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의 진언(眞言)이 범패(梵唄)의 운율가락에 실려 장중하게 퍼진다. 천년고찰 봉원사(奉元寺) 마당에서 펼쳐지는 현충일 영산재(靈山齋)의 진수다. 고대 인도의 말 '다라니'는 우주의 소리를 전하는 진언이라고 하는데 옛날 어머니가 슬프실 때 항상 독송하시던 반야심경 속 그 말이다.

49재의 하나로 죽은 지 49일 만에 영혼을 천도하는 영산재는 석가모니가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생명의 존엄이 모든 생명에 불성을 내재케 해 누구에게나 부처가 되는 길이 열려있다'는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불교 의식 절차이다. 중생 영혼을 천도하는 진언, 범패, 화창 그리고 붉은 장삼을 걸친 4명의 승려가 양손에 놋쇠 바라를 들고 마주치며 춤사위를 펼치는 바라춤은 인도와 티베트를 거쳐 온 대승불교 전래의 원음과 숨결을 생생하게 전하는 것이기에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고 한다.

진언의 울림은 조선시대 선비의 시조가락 같기도 하고, 범패의 애조 띤 단조음은 조선시대 서민의 한을 노래한 판소리의 끝자락 같기도 한다. 한 법사는 "영가(靈駕)를 천도하는 바라춤에서 여러 아름다운 승무의 춤사위가 진화했다"고 하는데 내 젊은 시절 시 속 승무의 주인공은 백련 같은 여인이었다. 영산재의 불교음악과 춤사위는 우리 조상들의 삶에 스며들어 일반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원래 영산재는 단오절에 맞춰 열려 왔으나, 2007년부터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국가적 행사로서 현충일에 시연되는 행사로 기일이 바뀌었다. 호국불교에 뿌리를 둔 한국불교의 결정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한데 이번 2014년 영산재는 특별하다. 호국영령의 극락왕생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 특히 피지 못한 채 진 꽃봉오리들의 영가의 극락왕생도 발원하는 천도재인 까닭이다. 태고 우주의 소리가 저럴까. 애조 띤 진언의 울림이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 때, 물이 차오르는 선실에서 부모에게 "엄마, 아빠! 사랑해요. 미안해요. 부디 행복하세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던 꽃봉오리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를 속으로 외었다. 지시대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던' 그들을 어찌 단 한 명도 구출해내지 못했다는 말인가.

6·25의 비극 또한 내 가슴을 저민다. 원로 수필가 김병권 선생의 작품 '5월의 나비' 속 주인공인 젊은 병사의 명복을 또한 빌었다. 1952년 봄 동부전선 최전방 고지의 참호에서 죽은, 시를 쓰던 앳된 청년의 실루엣을 지울 수가 없다. 당시 김병권 소대장의 대원이었던 그는 전투가 소강상태를 보여 참호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 노랑나비 한 쌍이 날아와 잡으려고 일어나자 적군 저격병의 총탄세례로 즉사했다. "몸은 비록 전쟁이란 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한다 하더라도 전쟁을 혐오하는 그 마음은 두둥실 나비들과 어울려 찬란한 평화의 나라로 비상했다"고 작가는 진언했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과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병사들의 비극은 내 작은 가슴의 한 귀퉁이 옹달샘에 눈물을 고이게 한다. 그 샘물로 더러워진 내 영혼을 씻어내면서 산다. 지난 봄 상재한 수필집 '비극의 샘'에는 계속 눈물이 고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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