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치자 저녁이다 내 가고자 하는 곳 있는데, 못 가는 게 아닌데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저녁이다 저녁엔 종일 일어서던 마음을 어떻게든 앉혀야 할 게다 뜨물에 쌀을 안치듯 빗물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하고 앉아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저녁이다 종일 빗속을 생각의 나비들,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젖어가는 날개 가진 것들의 젖어가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저녁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늙어가는 어떤 마음과 다름없는 것을… 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을… 비가 그 무슨 말씀인가를 전해주었나보다

<감상> 날씨의 변화에 따라 사람의 마음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 비 그치고 맞이하는 저녁 풍경이 잔잔하게 눈앞에 머무른다. 요란한 칼라 풍경이 아니고 흑백 풍경이다. 그럼에도 마음에 들어앉은 다양한 갈등이 무엇인가 행함을 망설이게 한다. '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적 표현인가. 그저 그 아름다운 표현에 고개가 숙여진다. (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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