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은 즉위하자 공신들에게 벼슬을 내려 논공행상을 단행했다. 태종의 숙부 이신통이 황제에게 인사 불만을 토로했다. "처음 수나라에 반기를 일으켰을 때 저는 가장 먼저 병사들을 이끌고 호응했습니다. 방현령 같은 자들은 모두 붓대나 놀리던 자들인데 저보다 높은 일등급에 나열되다니 저는 승복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지극히 공평무사해야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소.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천하를 공평하게 다스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사사로운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되오. 제갈공명은 약소국인 촉나라 재상을 지내면서 '나의 마음은 저울과 같아 사람을 대하는데 조금도 편협함이 없다' 했소. 하물며 나는 거대한 당나라를 다스리는데 어찌하겠소. 나와 여러분이 날마다 입고 먹는 것이 모두 백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오. 그러므로 백성들을 위해 관직을 세우고 마땅히 어질고 재능 있는 자를 선발, 등용해야 하오. 친소관계에 따라 벼슬을 내리거나 단지 옛 부하라해서 먼저 관직을 내려서는 아니 되오." 이처럼 대당제국의 치세를 이룩한 당태종의 용인 원칙은 공평무사였다.

태종 이세민의 공정한 인사원칙 때문에 당태종 치세 중에는 황제를 전심전력으로 보필한 뛰어난 신하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서도 방현령, 두여희, 위징 등은 대표적인 명신들이었다. 방현령은 당태종이라는 영명한 군주를 만나 20년간 재상자리를 지키면서 통치자를 보필했다. 70세로 타계할 때까지 충실하고 근면하고 유능한 재상으로 일관했다. 두여희가 외지 근무 발령이 나자 방현령은 태종에게 달려가 외지 근무 발령을 거두어들일 것을 간청했다." "다른 사람은 외지로 아무리 많이 간다 해도 애석하지 않으나 두여희만은 전출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대국을 읽을 줄 아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천하를 안정시키는 데는 절대 필요한 인재입니다."태종은 두여희의 외지발령을 취소하고 그를 중용했다.

'방모두단(房謨杜斷)' 즉 방현령의 지모와 두여희의 결단은 태종의 '정관의 치'의 견인차가 됐다. '안전 100% 대한민국'을 만드는 국가개조 성패는 인사에 달려있다. '수첩인사' 비판 받는 박근혜 대통령에겐 이세민 '저울인사'가 '금과옥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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