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통일을 위해서라도 6·25는 마음속에 각인돼야 잘 산다는 것은 잘 키는 것

제갈 태일 편집위원

지금 이 나라에 6·25가 있는가?

6·25의 추억만 있고 젊은 세대는 그마저 없다. 그러나 6·25는 아직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이 생생하다. 걸핏하면 북한은 동해로 미사일을 쏘며 핵 실험을 감행했다. 구미에 맞지 않으면 '서울 불바다'운운하며 패악(悖惡)을 일삼고 주사파들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이 땅의 종북 세력은 6·25 북침설로 터무니없이 날조하며 부화뇌동하고 있다. 중학생을 빨치산 추모제에 참석시키는 전교조 교사도 있다.

6·25는 치밀하게 준비된 남침이었다. 수도 서울이 사흘 만에 함락되는 날벼락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실을 생생하게 실증한다.

필자가 살던 대구근교에는 남부여대로 몰려오는 피난민들과 전선을 오르내리는 부상병들의 행렬이 뒤섞여 난장판을 이루었다.

낙동강에서 일진일퇴하던 피아간의 사투는 강물을 피로 물들였고 학교는 부상병들로 넘치는 야전병원이 되었다. 가마니를 깔고 앉아 공부하던 가교사에서 날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나가자"는 섬뜩한 군가합창에 매료되었으니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강렬하다.

북한은 인구 28%인 272만 명이 사망했고 남한은 인구 7%인 133만 명을 잃었다. 중국은 100만 명이 죽었고 미국도 6만3천명이 이 땅에서 산화했다. 전쟁은 이 땅을 초토화했고 외신들은 '쓰레기통에도 장미꽃은 필 것인가?'로 아예 신의 저주를 받은 땅으로 치부했다.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투는 더욱 악천후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중공군 9병단 10개 사단 12만 명의 인해전술로 아군 10군단은 완전히 포위되었기 때문이다. 국군은 물론 UN군들도 영하 40도 혹한에 장진호전투에 참가해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당시 미 해병대 사단장이던 스미스 소장은 포위망을 뚫고 철수작전을 시도한다.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탄약과 보급품을 비축했고 11월 28일 맥아더는 10군단 후퇴를 명령하게 된다.

그로부터 12월 1일까지 중공군은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고 미 해병1사단은 특유의 투혼을 발휘하며 인해전술을 탁월한 전략으로 막았다.

12월 5일 C-47 수송기가 하갈우리에 착륙하여 부상병과 전사자를 수송하고 보급품과 보충병을 공급했다. 이때부터 인해전술로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흥남부두로 필사의 탈출 작전을 시도하게 된다.

아군은 사선을 뚫고 12월 15일 흥남에 도착하여 대기 중인 군함에 승선하게 된다. 이른바 '함흥 흥남 철수작전'이었다.

혹한 속에서 10배가 넘는 중공군과 싸우면서 장비, 부상병, 전사자와 함께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해병이기에 가능했고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12만명을 막지 못했다면 우리나라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국가 안보는 최우선 가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멸망의 길을 걷는다는 잠언을 깊이 새겨야 할 때다. 아직도 6·25는 죽지 않는 불가사리처럼 괴물로 살아있다.

진정한 통일을 위해서도 6·25는 마음속에 각인되어야 한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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