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시 도와준 우방국과 이산가족 등의 아픔 잊지말고 튼튼한 안보의식으로 나라지켜야

정동근 폴리텍대학 구미캠퍼스 교학팀장/교수

오늘은 6·25 전쟁 발발 64주년이 되는 날이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패한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우리는 35년간의 일제치하를 벗어나 독립했다. 3년간의 신탁통치를 거치며,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아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제헌의회를 구성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초대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유엔총회는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승인하게 된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7년 그들만의 단독정부 수립준비를 완료해 1948년 9월 9일 그들 정부를 수립했다.

대한민국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가는 과정에 벌어진 국론분열의 혼란을 틈타 북한이 감행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의 기습남침으로 불과 3일 만에 우리는 서울을 빼앗기고 8월초에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게 됐다. 전쟁발발 3일 만에 유엔은 한국지원을 결의, 미국, 영국, 캐나다 등 16개국이 전투지원을, 인도, 스웨덴 등 5개국이 의료지원에 나서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젊음을 던졌다. 3년 1개월여의 전쟁으로 국토는 초토화됐으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공군 100만 명, 민간인 피해 250만 명, 이재민 37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천여만 명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절반을 넘는 1천800여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휴전 7년 후 태어난 나는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폐허 속의 초중등시절을 살면서 매년 열리는 반공 글짓기와 웅변대회를 통해 북한의 침략성을 꾸짖었고, 매달 민방공훈련을 실전처럼 참여했다. 때가 되어 군에 입대했을 때 나는 M1소총으로 훈련받으며 6·25참전 선배들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분들의 생사를 넘나든 희생에 의해 오늘날 우리들이 경제성장을 이루고 수출대국이 된 것을 감사하고 있다.

만일 유엔참전국들이 그때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낙동강 방어선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 우리는 공산치하에서 밤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단농장에서 생활하며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을 것이다.

전후에도 우리는 미국 등의 원조에 힘입어 참담했던 폐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으며, 지금은 기술 강국에다 부강한 나라가 되어 후진국을 도와주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우리는 늘 우리가 어려웠던 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려웠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오로지 자유 수호라는 숭고한 이상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아들들을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 보내준 우방국들의 고마움에 경의를 표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전쟁을 잊지 않아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나는 참전국인 미국에서 뉴욕 맨해튼 남쪽 끝 배터리 공원에 있는 기념비와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부근에 세워진 기념비 등 두 곳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보았는데, 알고 보니 미국에는 곳곳에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물론 다른 참전국들에도 기념비가 많이 있을 것이라 여긴다.

그들은 남의 나라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한 그들 고장의 사람들을 기리고 존경하고 있다.

우리도 다부동 전적기념관 등 이웃의 기념관을 찾아 6·25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의 노고와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젊은 세대들의 산 교육장이 되도록 하자.

해마다 진행하고 있는 국군유해발굴사업도 잘 진행돼 지금은 연로해진 유가족들의 한을 빨리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북한의 도발은 지속되고 있다. 튼튼한 안보의식과 애국으로 뭉쳐 조상들이 피땀 흘려 지킨 이 강토를 흔들림 없이 잘 지켜 나가도록 하자.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