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 공양으로 성불을 했다면 부처님이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부처님이 되었다면 지금까지 모든 불상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은 거룩하고 원만하고 평화스러운 상호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가까운 부처님다움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룩하고 부드럽고 평화스러운 맛은 지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금불각의 가부좌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 고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얼굴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떠한 대각보다도 그렇게 영검이 많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等身佛)'에 나오는 소신공양(燒身供養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과 등신불에 대한 인상이다. 김동리는 소설 속의 등신불이 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의 금불각 속에 안치돼 있는 불상이며 '등신금불(等身金佛)' 또는 그냥 '금불'이라고도 불렀다고 썼다. 묘법연화경에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다."라고 찬양했다.
불교 역사상 많은 고승들이 이 공양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신공양은 온몸을 태우기 때문에 뼈와 재밖에 남지 않지만 등신불은 완전히 타버린 것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 태국 등지에 더러 등신불을 모신 전각이 있다. 중국 구화산에는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인정받고 있는 등신불이 있다. 신라왕자 김교각의 열반상이다. 김교각은 719년 24세의 나이로 당으로 건너가 출가했다. 구화산 화성사(化城寺)에서 구도 활동을 하다가 75년간 수련한 후 99세에 열반했다. 794년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까지 한 뒤 입적했는데,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산이 울면서 허물어 졌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나는 이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은 열반 후에도 육신이 3년간 썩지 않아 신도와 승려들이 육신에 금을 입혀 등신불로 봉헌했다. 경북일보가 '김교각 지장보살을 통한 한·중 문화교류'를 주제로 그의 고향 경주에서 10일과 11일 문화포럼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