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부드럽다. 그러나
성난 칼보다 무서웠다
눈물을 감춘 슬픔이 활활 타 내리는
하얀 불꽃 송이송이
산과 들 도시를 쾅쾅 밟아댔다
길을 끊고 전선을 끊으며
인간의 오만을 폭삭 주저앉혔다
옴짝달싹도 못하고
온 산하가 백기를 들게 했다
항복 문서를 받아내는 눈(雪)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임을
오늘 나는 비로소
눈 속에 묻힌 길을 불러내며
아득히 읽어낼 참이다
<감상> 덥다. 더위를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팥빙수를 먹기도 하고, 겨울을 떠올리기도 한다. 부드럽게 내리는 작은 눈송이가 쌓이고 쌓여 길을 막고, 전깃줄도 끊고, 이웃과 통신도 단절시킨다. 눈 속에 묻힌 길을 불러내는 한 겨울을 생각하는 일도 이 더위를 조금 저쪽에 두는 일이다. 부드러운 것들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여름은 즐겁다. (하재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