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라이언은 50대 중반의 영국 퇴역장교로 한 때 탐험활동도 했다. 1976년 마이크 라이언이 이끈 탐험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고 하산하던 중 예상치 못한 강한 눈보라를 만났다. 한걸음 떼어놓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나 눈보라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산이 지체되면서 식량도 바닥나게 돼 캠프를 설치, 쉬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산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마저 눈 속에 파묻혀 길을 헤매면서 대원들은 지쳐갔다. 더욱이 모든 대원들이 무거운 장비를 지고 며칠씩 쉬지 않고 걷는다는 것은 아주 난감한 일이었다. 굶어죽느냐, 지쳐죽느냐 갈림길의 대원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 때 마이크 라이언은 과감히 모든 장비를 버리고 식량만 짊어진 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원들 모두가 그의 행동을 반대했다. 하산 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열흘은 걸리는데 캠프장비를 버리게 되면 열흘 동안 쉬지 않고 걸어야 할 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원들의 만류에도 마이크 라이언의 결심은 단호했다. "우리에겐 이 방법 밖에 없다. 이 눈보라는 열흘, 아니 보름이 지나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 왈가왈부 시간만 끌다간 아직 남아 있는 표지판까지도 눈 속에 모두 파묻힐 것이다. 캠프장비를 버리면 우리는 더 빨리 걸을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결국 마이크의 의견을 받아들인 대원들은 모든 장비를 버리고 그를 따라 나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고 걸어 8일 만에 하산에 성공했다. 눈보라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 뒤 영국왕실박물관의 한 직원이 마이크라이언을 찾아가 등반 당시 지니고 있었던 물품 중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박물관에 기증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증품은 동상이 걸려 절단한 마이크 라이언의 발가락 열개와 오른쪽 손가락 마디 다섯 개였다. 생명줄과 같은 캠프장비를 포기한 마이크 라이언의 결단이 모든 대원들의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국회 파행 책임이 야당의 뒤집기에 있지만 국정운영 정상화를 위해 여당이 김기춘실장의 세월호 청문회 출석 방어를 포기하는 것도 정치적 용기다. 국민을 우롱하는 야당의 막가파식 정치를 이기는 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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