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년 탄생…시대마다 충절의 정신으로 한민족 발전 ‘선도적 역할’

올해는'경상도(慶尙道)'라는 도명(道名)이 사용된 지 700년이 되는 해다.

고려 충숙왕 원년인 1314년 경상도라는 이름을 얻은 경북도가 '개도 700주년'을 맞아 재도약을 노리고 있다.

경북도가 경상도 개도 70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신경북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다채로운 문화예술행사를 통해 미래 경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방침이다.

△경상도 개도 700년

경상도라는 도명은 1314년(고려 충숙왕 원년)에 정해졌다. 이후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나눠진 1896년(고종 33년)까지 경북도는 조선시대부터 국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경상도의 등장(1314~1392)

918년 고려가 건국한 뒤 지방행정체제는 신라의 9주(州)에서 군현제(郡縣制)로 바뀌었다. 그 뒤 성종(재위 981~ 997) 2년(983)에는 12목(牧)으로, 성종 14년(995)에는 10도(道) 채제로 바뀌었다. 현종(재위 1009~ 1031)때 이르러 5도 양계(兩界) 체제가 완성됐다.

경상도 일대의 도명(道名)은 5도 체제 속에서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 경상주도(慶尙州道),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 등으로 계속 바뀌었다.

충숙왕(재위 1313~ 1330) 원년(1314)에 이르러 비로소 '경상도'가 등장했다. 고려의 동경(東京)이었던 경주(慶州)와 교통의 요충지였던 상주(尙州)의 중요성을 감안해 '경상도'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경상도라는 이름은 변함없이 쓰였다.

2. 경상감영 1기(경주·상주 시기/1392~1593)

1392년 개국한 조선은 경주에 경상도 감영을 뒀다. 경주를 다스리는 부윤(府尹)이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를 겸했다. 그러다가 1407년(태종 7) 경상도의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관리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조정에서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을 우도(右道), 동쪽을 좌도(左道)로 나눴다. 좌도는 경주 부윤이, 우도는 상주 목사가 각각 관찰사를 겸했다. 이듬해 좌도와 우도를 다시 합쳤다. 경주에 있던 감영을 상주로 옮겼다. 상주 감영은 임진왜란 직후까지 약 200년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경주와 상주에 감영이 있던 시기에 조선 왕조는 유교를 기반으로 나라의 정통성을 확립해 갔고,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세종대왕때는 한글 창제, 과학 발달, 농서 발간 등 다방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출신 인재들도 크게 활약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사림(士林)이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고 이들은 사상 논쟁으로 다양한 학파를 형성했다. 경상북도는 양남학파의 중심지로써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이 나라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이끌어 나갔다.

이처럼 경상감영 1기는 조선 개국부터 임진왜란 직후까지의 시기로서 많은 인재들이 등장해 그들이 낳은 사상과 문화가 융성했던 시기였다.

3.경상감영 2기(성주·달성·안동시기/1593~1601)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반발로 경상도 전역은 전쟁터가 됐다. 주요 도로 대부분을 왜군이 장악했다. 관군의 연패로 전쟁의 길목에 위치한 상주의 감영은 제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조정에서는 긴급히 경상감영을 경주와 상주로 나눠 교통로를 확보하고 보고체계를 원활히 하고자 했으나 전세는 불리하게 기울었다.

1593년(선조 26) 경상감영을 성주의 팔거(현 칠곡군)로 옮겼다. 1595년(선조 28) 임진왜란이 휴전기에 접어들자 경상감영은 다시 경주와 상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란중에 대구가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됐고, 1596년(선조 29) 경상감영을 대구 달성으로 옮겼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대구의 달성감영은 안동으로 긴급히 옮겼다. 1601년(선조 34) 대구감영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4년 동안 안동에 감영이 있었다.

이처럼 불과 1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경상도의 최고 행정기관이었던 감영이 빈번하게 옮겨 다녔다. 이년 경상도 지역의 급박했던 전쟁 상황과 도민들의 피해가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4.경상감영 3기(대구 시기/1601~1895)

임진왜란때 주주 옮겨 다년던 감영은 1601년(선조 34)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에 정착했으며, 1895년(고종 32) 감영이 폐지되기 전까지 존속했다. 이 기간중 관찰사가 지속적으로 머무르게 되면서 감영은 차츰 안정됐다.

17세기는 임진왜란 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던 때였다. 대동법의 실행, 상평통보의 발행 등 경제 개혁 정책들이 시행됐으며, 농업과 상업도 발달했다. 경북의 양반들은 성리학적 규범속에서 향약을 결성해 향촌질서를 유지했다.

18~19세기에 경상북도 사람들은 정치, 사회, 예술 전반에 걸쳐 성숙한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에 시대적 특징들을 실학의 도입과 서학의 유입, 전경산수의 발달, 출판물의 확산 등의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경상감영이 대구에 300년 가까이 존속하고 있는 동안 경상북도는 안정된 상황속에서 다방면에 걸쳐 발전을 거듭했다.

△개도 700주년 기념 문화한마당 등 다양한 행사

경북도는 개도 700주년을 축하하는 도내 23개 시군 문화원 회원들을 중심으로 시군별 대표 문화·예술·공연을 발표한다.

23개 시군 문화원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시군별 문화행사를 발표하고, 개도 700주년을 축하하는 기획행사전도 갖는다.

오는 10월께 문화원별 여성민속행사 발표와 시연, 소품 전시와 예술활동 및 경제·생활 등 문화별 유물을 전시하는 경북 풍물한마당 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또 독도에서 지역 문화예술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차전놀이, 농악놀이, 풍물패, 사물놀이단 합동공연도 가질 예정이다.

이와 함께 경북도는 우리 민족사의 근간이자 경북 전통문화의 뿌리인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해 재정립함으로써 신라의 영광과 경북인의 정신을 재조명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신라 천년의 역사·문화사를 편찬한다.

태동에서 패망까지 신라의 역사를 통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분류사로 정리한 총서와 총서의 내용을 보완하는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 관련자료들을 모아 도록형태로 발간할 계획이다.

또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도내에 흩어져 있는 아리랑을 발굴해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고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개발해 지역 아리랑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경북아리랑의 활성화도 도모한다.

내년말까지 시군에서 전해오는 지역 아리랑에 대한 일제조사를 실시해 작곡 및 가사를 정확하게 교정해 체계적 보존, 관리 및 육성하는 한편 경북아리랑의 우수성을 홍보해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10월 중 문경새재에서 '다함께 불러보자. 경북도 아리랑!'이란 주제로 개도 700주년 기념 경북도아리랑 페스티벌을 개최할 예정이다.

김관용 도지사는 "올해는 경상도 개도 70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새로운 마음가짐을 통해 그동안 우리나라의 중심에 있었던 경북도가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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