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운제부인(雲梯夫人)과 석탈해(昔脫解)는 누구인가

캘리그래피-삼우애드

1세기, 포항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여성이 있었다.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서기 4~24재위)의 왕비 운제부인(雲梯夫人·雲帝夫人이라고도 함)이다.

열나흘밤의 달처럼 환한 미인이었다는 이 여성은, 포항의 진산(鎭山·그 고장을 지켜준다는 산)인 운제산(雲梯山)에 살고 있었다. 가뭄이 들면 항상 기우제를 주관했고, 이 산에서 산출되는 숫돌 제조를 관장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숫돌은, 칼 도끼 화살 농기구 등 고대의 각종 철기(鐵器) 제조에 반드시 필요로 했던 주(主) 자원이었다. 조선조 제9대 성종(成宗) 때 편찬된 지리·풍속지 '동국여지승람'에도, "운제산에서는 질이 아주 좋은 숫돌이 발굴된다"고 특기하고 있다. 운제부인은 보배와 같은 이 숫돌 바위 수성암을 관장하기 위해 아예 운제산에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포항의 진산(鎭山) 운제산. 해발 480m의, 숫돌과 사철과 찰흙의 산.

남편 남해왕은, 초대 신라왕 박혁거세(朴爀居世·서기 전 57년~서기 4년 재위)의 큰아들이다. 먼저, 이 '박혁거세'란 이름 풀이를 해보자. 박(朴)은 성이요, 혁(爀)은 이름이지만, 거세(居世)란 무엇을 뜻하는 낱말일까. '거'는 '거둬들임'을 뜻하는 말, '세'는 '무쇠'를 가리키는 신라말이다. 따라서 '거세'란 '무쇠를 거둬들이는 사람'을 가리키는 왕호(王號)임이 밝혀진다.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고대 제철은 모두 '사철(砂鐵) 제철이었다. 강물 따라 흘러내려오는 사철을 건져 말려서, 숯과 함께 층층으로 흙 고로에 넣어 72시간을 불때고 녹힘으로써 무쇠는 만들어진다. 이 전체 과정 중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 사철을 거둬 모으는 '거세' 행위라 할 수 있다. 제철은 거세, 즉 사철 모으기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거세'라는 신라말을 왕호로 쓴 신라사람의 긍지를 읽게 된다.

운제산 정상의 대왕암. 운제산은 숫돌의 산이다.

그럼, 남해(南解)란 무엇을 가리키는 왕명인가. 이 한자는 고대 음독(音讀)으로 '남개'라 읽어야 한다. 남개는 '나무'라는 뜻의 고대말이다. 요즘의 포항말로도 나무는 '남개', '남구' 등으로 불린다. 신라 제2대왕은 '나무왕'으로 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고대 제철에는 엄청난 양의 숯이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10t의 사철을 녹히자면 숯은 무려 12t이나 필요했다. 그런데 이 12t의 숯을 만들자면, 무려 1만 평방미터(1㏊) 분의 산림이 필요하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벌거숭이가 된 산이 다시 원상대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려 30년이나 되는 세월이 요구된다고 한다.

운제산에서 내려다 본 포항시 전경.

신라는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제철을 시작한 선진국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도 전의 그 옛날에, 한국인은 무쇠칼과 도끼, 화살촉, 바늘을 쓰는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양지에는 그늘도 따른다. 신라의 언저리 땅에는 벌거숭이 산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운제부인의 남편 남해왕은 이 현상을 최초로 걱정한 현명한 정치인이었다. '남해'란 이름의 '해(解)'자의 고대음은 '개'. 남개는 '나무'를 뜻하는 신라말이다. 늘 나무 걱정에 지새며, 나무 가꾸기에 골몰했다 해서 '남개왕' 즉 '나무왕'이라 불린, 이 선진적인 임금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돌이키게 된다.

이영희 전 교수

운제산에서 나는 숫돌로 좋은 철기를 만드는 데 이바지 한 왕비와 벌거숭이 산에 나무를 심는 데 힘쓴 임금 내외. 이들은 인재를 키우는 데도 남다른 힘을 썼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24년~57년)은 남해왕의 아들이지만, 제4대 탈해왕(脫解王·57년~80년)과는 생판 남남이다. 단지 그의 재능과 학식을 평가하여 사위로 맞아들였고, 왕위에 오르는 길까지 열어 주었다. 석탈해(昔脫解)는 키 1m, 머리둘레 30㎝의 '작은이'였다. 난장이가 임금이 되기까지 운제부인과 그의 딸 아효(阿孝)는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다.

석탈해는 일본에서 건너왔다. 아버지는 예(濊) 땅에서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가 영토를 개척하던 인물이다. 석탈해가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고장이 이즈모(出雲)지방 즉, 요즘의 시마네현(島根縣)임을 감안할 때, 아버지가 개척했다는 지방도 이 일대가 아닐까 여겨진다.

일본은 원시(原始)종교적인 애니미즘의 고장이다. 전국의 고을마다 '진쟈(神社)'라는 서낭당이 있어, 갖가지 신(神)을 모시고 있다. 하나의 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을 두루 받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 크고 작은 신사의 총 수는 20만을 넘을 것이라는데, 여기서 받들어지고 있는 신들 가운데 단연 '인기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얼굴은 '스크나히코나신(少彦名神)'이라 한다. 학문·의약(醫藥)의 신, 국토를 넓힌 신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합격'의 신으로 받들어져 있어, 이 신을 모신 사당에는 입시(入試)철이면 문전성시(門前盛市)를 이룬다. 이 '스크나히코나'란 바로 석탈해왕의 일본 이름이다.

하기야, 키 1m, 머리둘레 30㎝의 몸으로 당당히 제철(製鐵) 신라국의 왕이 된 인물이니, 입학·입사(入社)시험에 앞서 한 차례 가뵈고 당부 드려보고 싶어질 법도 할 것이다.

일본에는 '한치법사(一寸法師)'라는 옛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키가 한치(一寸) 밖에 안되는 사내 아이가 훗날 당당한 몸매의 어른이 되고 성공도 한다는 스토리다.

이 민화 속에 '공주'가 등장한다. 공주는 키가 한치 밖에 안 되는 법사를 부채로 부쳐주며, '크게 되라'고 계속 외운다. 공주의 소원대로, 부채 바람 속에 한치 법사의 몸은 무럭무럭 자라 늠름한 남자가 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산다는 이야기. 석탈해왕과 아효공주 스토리를 닮았다.

석탈해왕의 히스토리 속에는 숫돌 이야기도 등장한다. 경주 이씨(李氏) 시조 호공의 저택이, 서라벌 남천(南川) 기슭에 있었는데, 이 집이 가장 쓸만하여 속임수를 써서 빼앗아버린 것이다.

석탈해는 이 집 마당에 몰래 들어가 숫돌과 숯을 묻어놓고, 다음 날 아침 그 집 대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우리 조상이 살던 집이요!"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호공과 석탈해 사이의 시비는 관청까지 가게 됐다. "우리 조상은 원래 대장장이었는데, 잠시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빼앗긴 것이요. 집안을 뒤져보면 대장장이 흔적이 나올테니 조사하여 주시오."했다.

관리들이 집 마당을 뒤져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집은 석탈해 조상의 것으로 판결이 나고 말았다. 석탈해는 과공의 집을 거뜬히 차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같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호공의 집을 차지해야 했던 까닭은 그 집의 위치에 있었다. 호공의 집은 서라벌 남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냇물이 초승달 모양으로 구비치는 자리에 있었다. 사철은 바로 이같은 곳에 몰려 쌓인다. 이것이 바로 '환상의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무쇠모래의 노다지 지대다.

거세, 즉 사철 모우기를 우선적으로 해야 할 제철왕으로서는 이같은 채집장을 선점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호공의 집 마당에 몰래 파묻은 숫돌은 운제산 기슭에서 만들어 진 숫돌이었을 것이다.

운제산에 올라가 봤다. 며칠전 내린 비로 냇가의 산길은 불그레한 사철로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운제산이 무쇠의 산이기도 함을 일러 주는 증표다. 운제산은 숫돌을 생산하는 수성암과 함께, 사철 성분을 머금은 화강암의 산임을 일러 준다.

사철의 산은 아름답다. 유연한 능선의 독특한 아름다움이다. 신광(神光)의 비학산(飛鶴山)이 그렇고, 경주의 수많은 낮는 산들도 그렇고,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 걸쳐 이어지는 가야산은 웅장하고도 섬세하다.

운제산은 좋은 찰흙의 산지(産地)이기도 하다. 고대에는 이 운제산의 찰흙으로 많은 도구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전통을 살릴 길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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