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중은의 풍수이야기 (13) - 산과 강 氣 충만, 풍수지리적으로 예견된 인재 명당

퇴계 이황선생 태실(胎室), 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동 빼어난 경치 자랑, 넓고 풍부한 여러 가지맥의 기운을 한 몸에 받아

등록일 2014년08월28일 20시47분  
양동주 좋은터생활연구원 원장양동주 원장 프로필 △ 포항 신광 출신 △ 영남대학교 출강 △ 대구한의대학교 대학원 출강 △ 좋은터생활연구원 원장 △ (사)精通風水地理硏究學會학술이사 △ 대구교육대교,포항대교,영진전문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 교수

퇴계선생의 성은 이(李),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이고, 퇴계(退溪)는 그의 호이다. 1501년 11월 25일 예안현 온계리, 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식(埴), 어머니는 순천 박씨였다.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퇴계선생이 태어나신 후 7개월만인 이듬해 6월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퇴계선생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좀 더 자세히 그의 가정 내력을 알아보면 퇴계선생의 관향(貫鄕)은 진성(眞城)이니 그 시조는 이석(李碩)이다. 그는 청송군 진보현의 아전이었다. 그러므로 진성 이씨를 진보 이씨라고도 한다.

퇴계선생은 이석의 6대손이다. 이석의 아들 이자수(李子修)가 고려 공민왕 11년에 비장(裨將)으로서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토벌하여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나라를 평안케 한 공신이란 칭호를 받고 송안군(松安君) 즉, 청송 안동지역을 지배할 수 있는 벼슬을 받음으로써 아전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퇴계 이황선생 태실(胎室).

그 후 왜구의 난을 피하여 진보현에서 안동부 풍산현 말애(磨崖)로 옮겼다가 다시 두루(周村)로 옮겨 살았다. 조부인 이계양(李繼陽)이 예안현 온계리의 경치를 탐하여 이 곳에 정착하게 되고, 퇴계선생이 여기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선생의 아버지 이식은 처음 예조정랑(禮曹正郞) 벼슬에 있었던 의성 김씨인 김한철(金漢哲)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1녀를 두었다. 그러나 3남중 한 아들은 어려서 죽고, 아들 잠(潛)과 하(河) 그리고 딸을 남긴 채 김씨부인은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다시 순천 박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4형제를 낳았으니 첫째는 의, 둘째는 해, 셋째는 징, 네째가 퇴계선생 황(滉)이다. 퇴계선생은 7남매 6형제의 막내로 태어나신 것이다.

노송정.

일찍 아버지를 잃은 퇴계선생의 형제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인물의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고 하거니와 퇴계선생의 어머니도 그러한 한 분이었다. 나중에 해(瀣)와 황(滉) 두 아들이 대과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음에도 부인은 크게 기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의 시끄러움과 벼슬길의 어려움을 근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인은 생각이 깊고 지혜로운 식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은 그 어머니의 묘비명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우리 어머니시다'고 하였다.

또 퇴계선생의 학문적 성장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삼촌인 송재(松齋) 이우이다. 그는 형인 이식과 함께 공부하여 대과에 급제하여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많은 치적을 남긴 학자였다. 그는 학문이 깊고 인품이 고매하였으며 형이 죽은 후 많은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며 그 학문을 지도했다. 퇴계선생도 학문의 기초를 삼촌인 송재공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퇴계선생의 태실이 있는 노송정종택은 퇴계선생의 조부이신 증이조판서 이계양공이 자리 잡은 곳이며 노송정공은 단종을 폐위시키려던 계유정난 때 초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이 곳 온혜에 터를 잡았는데 그 일화를 보면 공께서 봉화현 훈도로 있을 때 온혜를 지나다가 이곳 시냇가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신라현 고개를 넘어가다 잠시 쉬고 있을 때 허기진 승려 한분을 구명해준 일이 있는데 그 스님이 또한 온혜의 아름다움을 말하자 공도 여기에 동의하고 스님을 데리고 다시 온혜로 돌아와 스님은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지금의 노송정종택이 있는 그곳을 가르치며 여기에 터를 정해 살면 귀한 자손을 둘 것이라고 하여 노송정께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풍수지리로는 온혜리 퇴계태실(胎室)이 있는 종택으로 이어지는 용맥을 살펴보면 북쪽의 용두산에서 출발한 맥이 높고 낮음을 거듭하여 남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중심용맥을 비롯한 여러 가지맥이 남으로 뻗어 전체적으로 부채의 선이 손잡이 쪽으로 모아지듯 하는 곳, 그곳에 운곡리 용수사가 있으며 중심용맥은 산맥이 진행하고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볼 때 온혜천의 왼쪽으로 달려와 태실이 있는 종택에 이르러 진행을 멈춘다.

종택의 주산이 되는 산의 용맥을 관찰하면 산맥이 마지막 멈추기 전에 멈칫 멈칫하여 성봉을 만들고 있으며 종택 바로 뒤에서는 단아하고 순수하며 매끄럽고 후부한 자태를 만들어 넓고 풍부한 기운이 종택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청룡맥은 중심용맥에서 이어지는 맥이 종택을 감싸 안고 있어서 온혜천에서 얻은 물의 기운과 종택의 양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갈무리하고 있으나 아쉽게도 백호맥은 짧아서 온혜천 상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북서 계곡풍을 막아주는 대는 한계가 있다.

종택의 앞쪽에 있는 산을 풍수지리에서는 안산(案山)이라 하는데 용두산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용맥은 용수재를 거치면서 남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높고 낮은 재를 거듭 만들고 진행한 용맥은 명지산에 이르러 크게 성봉 하였다. 태실이 있는 종택에서 안산 쪽을 보면 여섯 개의 지맥이 종택을 향해 뻗어있어 그 기운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퇴계선생의 형제가 6남이고 1녀와 함께 칠남매가 되는데 이것은 후부한 내룡의 기운과 안산기운의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산의 여섯맥 중 마지막 맥이 성봉과 함께 기운이 가장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아 퇴계선생의 탄생이 풍수지리적으로 예견된 일이라 하겠다.

또한 가상 즉, 종택의 구조를 살펴보면 □자로 된 구조이며 종택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로 지었다. 일반적으로 종택의 구조는 □자 형식으로 건축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반해 이곳은 태실을 주택의 중앙에 돌출되도록 배치하여 종택 중심에 기(氣)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태실을 두었다. 이러한 주택의 구조는 보기 드문 구조로서 퇴계태실의 특이성을 볼 수 있다.

풍수지리학은 자연지리학으로서 인문학을 겸비한 자연에 순응하는 복합적 학문으로 생노병사와 자연 속에서 순수 발음의 이치를 연구하고 적용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1501년 이황이 이 집 몸채 중앙에 돌출된 방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퇴계태실로 부르게 되었다. 태실은 정면 7간 측면 6간의 홑처마 구조로서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사랑채, 뒤쪽에 정침, 좌우에 양측사를 둔 완전한 □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정침 중앙에 전면 1간, 측면 1간반 정도의 누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태실이 건물의 중앙에 위치한 것이다. 태실 누마루에 '是歲淸明日十四代孫家源(시세청명일14대손가원)이라 쓴 중수기(重修記)가 있으며, 1930년에 전면 개수하였으나 상류주택의 배치요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 태실 동쪽에는 노송정(老松亭)과 사당(祠堂)이 있으며, 맞은 편에 대문채인 성림문(聖臨門)이 있다. 이곳에 가면 온계종택과 더불어 바로 뒤쪽 골짜기로 들어 산을 오르면 퇴계선생의 조부모 묘와 부모 묘가 상하로 나란히 있다.

<ⓒ 경북일보 & kyongbuk.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