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상주·예천·김천 등 경상도 북부지역의 갑오 동학농민혁명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가 새로 공개됐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한국사연구회(회장 신영우 충북대교수)는 지난 26일 상주문화회관에서 '새로운 자료를 통해 본 경상도 북부지역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열고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남긴 '학초전'과 상주·김천지역 농민군 진압과정을 기록한 '소모사실'자료를 공개했다.

경상도 북서부 지역은 동학농민군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곳이지만, 그동안 1차 자료가 거의 발굴되지 않아 학계의 연구물이 거의 나오지 못했다. '학초전'에서는 일본군 부관 다케노우치 대위가 이 지역 도회(都會)를 염탐하다가 피살된 사건도 국내 자료로는 처음 기록돼있다. 경상도 북서부지역 동학농민군측 기록이라는 점에서 갑오 동학농민혁명은 30년 만에 새로운 연구가 가능해졌다.

또 김산 소모영에서 작성한 '소모사실'은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관군 소모영에서 작성한 자료로 상주와 김천의 농민군 활동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갑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전라북도가 그 중심지로 인식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지원도 기념재단도 전북에 있다.

역사적인 이 운동의 명칭도 완전히 정리돼지 않았다. 동학난에서 시작하여 현재 갑오동학농민혁명 갑오동학농민운동으로 불리고 있으나 농민 외에 양반과 향리 그리고 평민과 노비 등이 함께 참여하고 지주에서 걸식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농민이라는 단어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동학은 동학농민혁명의 이념적 뿌리이지만 그 자체로는 이론이고 국가공동체 단위의 실천은 갑오년에 일어난 농민혁명이다. 특히 당시 경상도 북부지역은 전국 어느 곳보다 항일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두해온 역사학계의 주장이다. 현 문경 소야리에 본부를 둔 경상도 북부 동학농민군 가담자는 48개의 접소에 7만여 명에 달한 것으로 당시 관아는 파악했다는 것이다.

경북도내 북서부 등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은 계급혁명운동만이 아니라 일제에 맞서 가장 먼저 무력항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으로 위상을 재고해야 한다. 일본군 정탐병이 현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의 농민군을 살해하면서 1894년 8월 경북지역 동학농민군과 충북 충주의 일본군 공병대 간의 예천의 한천(漢川)전투는 당시 농민군이 전국을 통틀어 일본군과 벌인 첫 전투다. 한천 전투에 참가한 민보군(民堡軍) 1천500여 명과 농민군 4천~5천명이 일대 격전을 벌였다. 척왜(斥倭), 안민(安民)이라는 반외세 반봉건의 자생적인 한국 근대화 민주화운동이자 민족운동이다. 의병운동에 가담함으로써 항일 구국 무장 투쟁을 활성화시켰다. 근대 항일의 발상지이다. 이 자유와 평등 이념은 3·1독립운동 10·1대구항쟁, 3·15마산의거 4·19혁명, 80년 부마항쟁 광주항쟁, 87년 6월항쟁으로 마침내 이 땅에 자유와 민주주의 세상이 온 것이다.

지난달 29일은 한국인에게는 일본에 강제병합당한지 104년이 되는 부끄러운 이른바 국치일(國恥日)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1876년 강제 개항 이래, 아니 임진왜란 318년 만에 일본이 그토록 호시탐탐 노리던 대륙진출 개막과 한반도 식민지가 완성된 위대한 날이지만 말이다. 갑오 동학혁명운동은 이 나라 근대사의 전환점이다. 갑오 동학혁명운동 희생자를 발굴해서 선양해야 함이 마땅하다. 경상북도가 행정적 지원을 하고 시민운동단체가 앞장서 기념사업을 벌여나가 지역의 정신적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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