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영남 유림은 크게 한탄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유교계는 그야말로 긴 독립청원서를 써서 일제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로 하고 대대적인 장서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장서를 전달해 조선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키로 한 것이다. 이 파리장서운동에는 경북 유림 62명을 비롯해 무려 137명의 유림 대표가 참여했다.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은 서명 작업과 함께 활동자금을 준비했고, 김창숙 등은 전국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한국유생 장석영 등은 절하며 글을 올린다. 망국의 비천한 유생으로 남은 목숨에도 죽지 못하고 십년 동안이나 혀를 감추며, 감히 천하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한 것은 타인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감히 품고 있던 마음을 만국평화회의 자리에 스스로 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듣건대 파리 만국회의에서는 폴란드 등 모든 약소국의 독립권을 허락한다고 했다. 우리 한국의 사정만이 유독 여러분들의 긍휼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태양이 하늘에 떠서 만물을 모두 비추는데도, 유독 동이 아래는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엎드려 바라건대 세밀하게 상황을 살피고, 특히 시모노세키조약과 유럽의 통첩 사례에 따라 우리들의 예전과 같은 독립자주권을 허락하고, 일본인의 그물에서 벗어나 세상의 동포들과 나란히 서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작은 나라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장석영의 파리장서 초안 일부다. 이 초안은 일부 내용이 너무 과격하다 해서 다시 다듬어 종이에 써서 김창숙이 짚신으로 엮어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져갔다. 임시정부에서는 다시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 한문 원본과 같이 3천부를 인쇄해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했다. 봉화군이 지난 28일 해저리 송록서원 앞에 이 운동을 기리는 파리장서비를 세웠다. 선열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의미 있는 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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