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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고대 수수께끼를 푼다- (4) 형산강은 사철(砂鐵)의 강

백만인구, 신라 천년의 수도 서라벌 富는 제철사업의 소산

글 = 이영희 (사학자·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등록일 2014년09월18일 21시08분  
포항 형산강 하류에서 바라본 포스코 모습.

'신라 천년(千年)의 수도였던 경주 즉, 서라벌은 인구 백만의 대도시였다'고 하면, 곧이듣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전성기의 신라 서라벌에는 17만8천936호나 되는 호구(戶口)가 있었다고 밝혀져 있다. 한 집에 식구가 다섯 명이 살고 있었다 해도 당시의 서라벌 인구는 90만이 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8세기의 그 옛날에 한 집의 식구수가 다섯만 되었겠는가.

이 무렵의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도 백만 도시였었다. 장안과 나란히 백만 인구의 대도시를 누린 신라 서라벌에는 금입택(금으로 치장한 호화로운 주택)이 35채나 있었다. '삼국유사'는 이 주택의 이름을 낱낱이 밝히고 있어 주목을 끈다. 이 중에는 김유신공의 할아버지 집도 있다. 이 같은 신라의 번영은 어디서 얻어진 것일까.

이영희 전 교수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제철(製鐵) 사업의 소산'이었다. 무쇠도끼, 무쇠 칼, 무쇠 갑옷, 무쇠 화살촉, 무쇠 말굽, 무쇠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무쇠 도구가 낳은 '윤택'이었다. 특히 신라의 도끼는 일본, 중국을 비롯하여 중동(中東) 여러 나라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8세기의 일본에서 읊어진 옛 노래 '만엽집(萬葉集)' 중에 신라 도끼를 바다에 빠뜨려 낙담한 나머지 바다에 빠져죽은 목수의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노래다.

무쇠의 반제품(半製品)도 인기 상품이었다. 신라에서 만든 무쇠덩이를 각국에서 사가지고 가서, 그 나라 취향대로 각각 무기를 만들어 쓴 것이다. 무쇠도 잘 팔렸지만 비단도 인기 상품이었다. 특히 안개처럼 얇고 아름다운 빛깔의 비단은 특히 중국인이 다투어 사갔다.

백만 인구의 서라벌에서는 초가집을 볼 수 없었다. 모두 기와집이다. 이 숱한 기와를 만들기 위해서는 삼베가 필요했다. 흙으로 기와를 빚어 말리기 위해서는 켜켜이 삼베를 깔아야 했기 때문이다. 삼베 짜는 일도 비단 짜는 일도 모두 여성의 몫이다.

신라의 남성들은 무쇠 만들기에, 여성들은 비단과 삼베 짜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녀 통틀어 돈 벌기에 바쁘게 지낸 셈이다. 신라인은, 특히 신라 여성은 번 돈을 어디에 썼을까.

절 짓기에 썼다. 서라벌 거리거리에는 수많은 절이 여성들의 헌금으로 지어졌고, 경주 남산(南山)에도 백여 개의 절과 암자가 지어져갔다. 전성기의 신라는 이래서 불교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서라벌의 중앙지 반원성(半月城) 터로 가봤다. 경주시 인왕동(仁王洞)에 속한다. 성터 아래 폭 5m 남짓의 남천(南川)이 졸졸 흐르고 있다. 이 냇물의 옛 이름은 문천(蚊川)이다. '모기가 모여드는 냇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철(沙鐵)이 모이는 냇가'라는 뜻으로 이같이 불린 것이다. 반월성의 임자는 이 냇가로 내려가 사철을 건져 와서 제철을 한 것이다. 성 안에 제철 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맨 처음 제철을 한 것은 경주 이(李)씨의 시조 호공이었다. 이로 미루어 호공도 제철 기술자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반월성은 애초부터 제철공장터였던 것이다.

서라벌의 역사에 해박한 김혁배씨를 반월성에서 만났다. 나무 그늘에 벤치도 마련되어 있어 공원처럼 꾸며진 성터 맞은편에는 버드나무 거목이 자리 잡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버드나무는 석(昔)씨 가문을 상징하는 나무다.

"저 버드나무 바로 아래, 석씨 자손들이 1982년까지 살고 있었지요. 철거하라는 경주시의 명령에 이사 갔습니다."

호공의 저택을 빼앗고 반월성을 차지한 인물이 바로 석씨 가문의 조상 석탈해, 신라 제4대왕이다. 20여년 전까지 반월성 안에 살고 있었다는 석씨 후예들은 그 드넓은 성 안이 일찌기 조상이 차지한 궁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넓은 성 안을 돌아보았다.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들과 잡초 우거진 오솔길은 계림(鷄林)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산책하는 사람이 간간이 보인다. 천년 고도(古都)의 왕궁 안답게 품격 있는 뜨락을 만들 수는 없을까. 답답했다.

간신히 남천, 즉 문천 물가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강변의 굽어진 '반월(半月) 지대'로 내려가 사철(砂鐵)을 건져 모은 비탈길일 것이다. 궁 안에 있던 제철 기술자들이 오르내린 비탈길일 것이다. 고대의 제철기술자들은 왕궁 안에서도 무쇠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서라벌 북방의 강 알천(閼川)에서도 사철 건지기 작업을 했다. 이 강의 요즘 이름은 북천(北川).

이 냇가에서는 사철만이 아니라 사금(砂金)까지 건져졌다. 사철과 사금이 건져지는 소중한 강이라 해서 '알천'이라 불린 이 강변에서는 빈번히 군대의 열병식도 열렸다. '강을 지키기 위한 행사'였다.

남천, 즉 문천이라 불린 반월성 남쪽의 강과 북천, 즉 알천이라 불린 반월성 북쪽의 강 모두 형산강(兄山江)의 지류(支流)다. 형산강은 사철의 강이었다.

경주와 포항 사이에 있는 산 형산(兄山)에 올라봤다.

형산강과 포항시가 한눈 아래 펼쳐져 보인다. 속이 후련해지는 광경이다. 그 기나긴 강줄기 중간에 작은 섬처럼 삼각주(三角洲)가 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저것이 바로 사철 무더기의 작은 섬이다. 고대의 제철 기술자들은 저 삼각주에 올라 사철을 캤다. 생선 바구니에 사철을 긁어모아 담고, 뭍으로 가지고 나와 제철을 했던 것이다.

형산강 하류에 운하(運河)를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강 하구(河口)에 커다란 삼각주 여러 개가 존재했다. 포스코 공장과 운하관(運河館) 사이에도 삼각주는 있었다.

현재 포스코 공장 건물이 즐비한 형산강변은 일찌기 '어링불'이라 불렸다. 어링불이란, '생선바구니 벌'이라는 뜻의 포항 고대어다. '어링'은 '생선바구니', '불'은 '벌'의 고대어. 생선을 잡아 담는 바구니가 '어링', '불'이 '벌'의 옛말이다.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내외도 이 생선바구니 벌판에서 삼각주로 건너와 바구니에 사철을 담아가지 않았을까. 바구니에 가득 담은 사철은 일월지(日月池)까지 날라 연못가에서 제철작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대의 제철은 반드시 큰 호수 가에서 이루어졌다. 고대 제철은 대량의 물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고대제철은 붉은 소나무, 즉 적송(赤松)을 태워 이루어졌다. 적송은 화력(火力)이 센 나무다. 송진이 탈 때 강한 화력이 생기는 것이다. 어링불에서 일월지 사이에는 적송 숲이 이어져 있어 땔 나무 구하기도 손쉬웠다. 어링불에는 가까운 강변에 사철의 섬이 존재했고, 그 사철 바구니를 들고 가면 호숫가에는 제철 용수(用水)가 충분했고, 땔나무도 가득했다.

제철 환경이 좋으면 좋은 무쇠가 생산되기 마련이다. 세오녀의 귀비고(貴妃庫)에는 질이 좋은 칼들이 항상 가득했을 것이다. '귀비고(貴妃庫)'란 기비, 즉 긴 칼을 넣어둔 창고를 뜻한다. 단순히 세오녀의 창고라는 뜻이 아니다.

'연오랑 세오녀'의 역사 서술에는 암유(暗喩), 즉 메타포로 가득히 채워져 있다. 암유는 은유(隱喩)라고도 한다. 암유는 직유(直喩)와 다르다. 설명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독자의 상상력으로 본질적인 사실을 알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연오랑 세오녀' 역사 이야기는 이 같은 수법으로 쓰여 진 글이다. 따라서 매우 어렵지만, 깊이 있는 재미를 지난 역사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따로 이에 관한 역사풀이를 소상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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