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방어 시설·한국戰 포화 이겨낸 동상 '아픔의 역사' 간직

부항지서망루.

△김천 부항지서 망루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의 부항지서 망루는 6·25전쟁 직후 주변지역에서 준동하던 빨치산들에 대항해 건립됐으며, 1951년 10월 전투에서 유용한 방어 수단으로 사용됐다.

북한의 비정규전은 전쟁전부터 지리산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돼 있었고, 1950년 전쟁 발발 직전에도 38선 지역에 4개 사단이 배치되고 나머지 4개 사단은 후방에서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을 정도였으며, 낙동강 전선의 붕괴와 동시에 북한의 패잔병들이 산악지대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적의 준동은 더욱 심화됐다.

금릉 추량지 은행나무.

김천시 부항면은 덕유산, 민주지산, 가야산 등등 높은 산에 둘러싸여 적의 공격을 자주 받았고,이에 망루와 같은 방어시설이 건축된 것이다.

당시 금릉면 주민들과 청년단등 주민들과 경찰이 협동해 건축했다.

부항지서 망루, 부항파출소 벙커, 망루 등등 용어가 혼용되고 있으나 부항지서 망루라고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높이 7m, 폭(하부) 3.7m, 폭(상부) 3.1m 규모의 사각형 망루인 부항지서 망루는 6·25전쟁 당시 유일하게 사각형으로 축조된 콘크리트 건물이다.

최송설당상.

△최송설당 상

김천중고등학교 송설역사관에 있는 최송설당 상이 최근 문화재청 등록(근대)문화재 제496호로 지정됐다.

현재 김천중고등학교(송설역사관)에 소장된 최송설당 동상(근대문화재 제496호)은 173×79×66㎝ 크기로 1935년에 당시 최고의 조각가인 김복진에 의해 제작됐다.

그러나 1944년 일제에 의해 공출되고 이후 그의 제자인 윤호중(1917~1967, 한국 최초로 동경미술학교에서 목조각을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미술학부를 설립자)에 의해 1950년 재현된 것으로 한국전쟁 동안 포화를 이겨낸 역사적 의미가 큰 동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금릉 조룡리 은행나무.

또 현존하는 동상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용접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리벳(rivet)으로 청동판을 연결시켜 조각상을 만들던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은 본관은 화순(和順), 본명은 미상이다. 경상북도 금릉 출생으로, 1886년(고종 23년) 아버지가 죽고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39세에 불교에 귀의해 정진하다 서울에 올라와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됐으며, 귀비(貴妃)에 봉해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 받았다.

이 후부터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1912년 청암사 중건에 토지 및 재산을 기부, 금릉학원(金陵學園)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1년 2월 전 재산을 희사해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해 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로 발전됐다.

시문에 능해 67세이던 1922년 한시 167제(題) 258수(首)와 국문 가사(歌辭) 49편을 수록한 '송설당집'을 발간했다.

당대의 대문장가 운양 김윤식(金允植)이 서문을 쓴 이 문집은 그녀의 학식이 상당한 수준이고 문학적 재능 또한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금릉 추량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김천시 대덕면에 위치한 금릉 추량리 은행나무의 나이는 약 4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37m, 가슴 높이의 지름은 6.6m로 마을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서산정씨 소유로 서산정씨 6세손 사신(斯信)이 김천시 봉산면(봉계)에서 추량으로 이거하고 11세손 처우(處祐)가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고 만년에 이곳에 단을 쌓고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 이만큼 자란 것이다.

연대로 따지면 380년의 수령이다. 나무 아래에 집이 있고 길이 났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피해가 없었는데, 꼭 한번 6.25(1950년)를 예언이나 하듯 3개의 큰 나무가지가 한꺼번에 땅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금릉 추량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호 속에서 살아왔으며, 생물학적·민속적 가치가 인정돼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금릉 조룡리 은행나무

김천시 대덕면에 위치한 조룡리 은행나무는 1456년 그가 죽은 후 은행나무를 심은 것으로 계산해서 현재 나이를 약 44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령은 420년이라 전하고 있으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24.8m, 가슴높이의 둘레가 12.93m, 뿌리 근처 둘레가 13.36m, 가지 밑 높이가 4m이고, 수관폭은 동-서 16.5m, 남-북 22.2m이다.

이 나무는 섬계서원(剡溪書院)의 뒷모서리에서 자란다. 1802년에 세원진 섬계서원은 김녕 김씨(金寧 金氏)의 선조인 백촌선생(白村先生)을 기념하기 위해 사후에 세웠으나 20여년전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했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300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섬계서원(剡溪書院)은 세종 때의 문신으로 단종복위에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관여했다가 죽은 김문기(金文起)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섬계(剡溪)는 본래 이 마을의 이름이 옛날에 섬계리(剡溪里)였으므로 붙인 이름이지만, 지금은 조룡리(釣龍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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