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도 아침이슬처럼 투명해지고 맑아지는 가을, 가을의 백미는 독서삼매경

제갈 태일 편집위원

가야금 소리도 맑아진다는 가을이다. 어느 시인은 가을을 여름이 타고 남은 잔해라 했다. 외로운 사람도 친구가 생기고 말도 살찌는 계절이다.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는 더욱 반갑다. 해오라기와 동의어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백로(白露)와 백로(白鷺)도 난형난제처럼 가을의 지문이다. 흰서리 날리듯 백로가 내려온다는 이태백의 시도 초가을의 질감을 영롱하게 한다. 눈부신 백로의 나래가 여름의 기억들을 모두 접어서 하늘로 물고 간다는 시도 있다. 해오라기는 백로지절에 절묘한 소품이다.

따라서 백로는 외로운 선비의 모습이다. 창공을 접는 기러기처럼 야심이 없고 겁 많고 성질 급한 꿩과도 다르다. 부엉이나 올빼미처럼 의뭉스럽지도 않다. 친구가 될 만 한 녀석이 있다면 두루미 정도다.

두루미가 걸걸한 편이라면 해오라기는 고요한 편이다. 두루미가 이마에 붉은 장식을 하고 까만 치마를 둘러서 꾸미는 마음이 있다면 해오라기는 그런 마음까지도 버렸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경지에 이른 도인이다. 언제까지나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며 옛사람들은 세상을 잊어버린 망기(忘機)의 경지를 얻은 도학자로 보았다. 가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침몰한다는 비유도 있다. 울창한 나무들의 푸른 색채가 쫓겨나며 망명길에 오른 폴란드 지폐 같은 낙엽을 보며 가을은 비정한 모반이란 메타포(은유·隱喩)를 떠올리게 한다.

은하수가 하늘 한복판으로 흘러 들어오면 가을은 점점 깊어간다는 징조이다. 달나라 항아는 맑은 감성으로 무현금의 가락을 듣는다고 한다.

우주는 살아있는 무현금이다. 풀벌레 울음소리, 새의 날갯짓에서도 생명력을 읽을 수 있다. 하느님의 명작들인 자연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관조의 세계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독서삼매경은 가을의 백미이다.

글을 읽다보면 아득한 옛사람과 호흡지간에 서로 만나 그렁그렁한 음성을 듣는다. 따라서 좋은 글에는 소리가 있다. 행간으로 울려오는 육성과 체취가 느껴질 때 전율을 체험한다.

글에는 빛깔도 있다. 감춤으로써 더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고 또는 드러냄으로써 더 환해지는 아름다움도 있다. 뽐내면서 감추는 이 사이의 미묘한 저울질에서 좋은 글의 흡인력이 있다. 또한 문장에는 '정'이 베여있다.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 외기러기의 울음소리를 얹어 놓고 시치미를 뗀다.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은 신의 거울로 시어(詩語)의 샘이다.

사물과 만나 그 의미를 마음으로 읽는 사람이면 시를 쓸 수 있다. 예술인의 주관적인 정이 객관적인 물(物)과 만나 빚어내는 그림이 경(境)이고 예술의 에센스다. 시인의 염원도 경을 여는 일이다.

사랑의 프리즘은 만물을 새롭게 보게 한다. 그 마음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서 사물에 얹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의 프리즘이고 가야금소리가 맑아지는 이유이다. 가을하늘이 청량한 것도 신의 지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도 아침이슬처럼 투명해지고 맑아지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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