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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고대 수수께끼를 푼다- (11)호미곶 ‘무쇠섬’ 군도(群島)

영일만 고대 이름 ‘근오기(斤烏支)’…사람·물건 오가는 대항만 뜻해

글 =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등록일 2014년11월06일 21시37분  
영일만 동쪽 끝 호미곶 바다. 검붉은 바위 위에 하얀 갈매기가 앉아 쉬고 있다. 근오기 바다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의 명가곡 '이별의 노래'의 '구만리'가 바로 포항 호미곶의 구만리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 애절한 노래(박목월 시인은 실제로 포항 호미곶 구만리에 가서 이 노래를 지었다)를 따라 구만리(九萬里)를 찾았다. 길게 해안이 이어지고 작은 집들 지붕 어깨 너머로 보리밭과 시금치 밭이 펼쳐진다.

영일만 북동단(北東端). 영일만항(迎日灣港)에서 외국에 보내는 물품들을 실어 보내는 크레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보리밭은 화가(畵家)나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우받지만 농민들은 보리밭보다 시금치 밭을 선호한다. 경제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만리에는 점차 보리밭이 줄어드는 추세다. '기러기 울어 예는' 구만리 바다의 낭만도 점차 사라져갈 듯한데, 호미곶면 대보리에는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아로새긴 시비(詩碑)가 있어 아쉬움을 덜어준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드문 시비다.

호미곶 바닷가에는 그림과 같은 풍경이 날마다 연출된다. 코발트블루 파도 위에 겹치는 눈부시도록 흰 물결과 그 물에 씻기고 있는 흑갈색 바위의 모습이다. 검은 바위는 영일만 바깥 바다에서도 본 적이 있다. 칠포 해수욕장과 월포해수욕장 사이의 오도리(烏島里) 바닷가에서 본 풍경이다. 영일만 외해(外海)에는 흑갈색 바위가 줄 잇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도리 바닷가는 일찌기 '노인헌화가'의 작사자인 바로 그 노인(경북일보 9월5일자 와 12일자 본 연재 참조)이 들렸다는 곳이다.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702~737 재위)의 장인이었던 이 '노인'은 무쇠가 출토(出土)되는 곳을 두루 찾아내는 뛰어난 기술자이기도 했다. '노인'은 바다 속의 무쇠 바위를 보러 오도리까지 갔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영일만 일대의 바다 밑과 바닷가 일대는 철맥(鐵脈)이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포스코는 철맥 위에 세워진 신비로운 제철소라 할 수 있다.

송도해수욕장에서 본 영일만. 포스코 포항제철소 위에 뜬 초저녁 반달이 아름답다.

영일만의 고대 이름은 '근오지(斤烏支)'였다. 사람과 물품이 크게 오가는 항만(港灣)이라는 뜻으로 이같이 불렸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742~765) 때부터는 임정(臨汀)으로 바뀌었다. '바다에 임한 고장'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고려 때에는 '영일(迎日)'로 바뀌어 조선조 때까지 영일현이라 불려왔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해적(海賊)들의 내왕하는 요충의 곳이다'라 적혀 있다. 주로 일본서 쳐들어 온 왜적(倭賊)이었다. 드러나 영일만(迎日灣)은 예부터 현재까지 예대로의 이름 그대로 '근오기' 즉 '큰 항구'다. 삼면(三面)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있어 가장 동쪽에 위치한 영일만은 동해(東海)를 관장하는 가장 큰 항구로 역할을 해왔다.

고대의 이름 '근오기' 그대로 크게 문물(文物)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한자(漢字)로 '근오지(斤烏支)'라 쓰고 '큰 오기'라 읽었다. '크게 사람과 물건이 오는 곳' 즉 '크게 문물(文物)이 오는 대항(大港)'이라 불렸던 것이다. 포항에서 일본 이즈모(出雲)로 오가는 뱃길은 특히 가장 가까운 항로였다. 포항에서 동쪽 바다를 향해 1초에 1나 쏜살같이 흐르는 해류(海流)가 있는데 이 바닷길을 타면 아주 재빨리 일본 오키(隱岐)섬에 당도할 수 있다. 이 오키 항구에서 남쪽으로 오십㎞만 배타고 가면 곧바로 일본 이즈모(出雲) 항구에 닿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대의 '신라 아이언 로드' 즉 '신라 무쇠길'이라 불린 철기매매(鐵器賣買) 길이었다.

포항 문화인들에 의해 호미곶면 대보리 바닷가에 세워진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시비(詩碑)를 찾은 필자.

신라 사람들이 만든 무쇠도끼, 무쇠칼 등 철제 도구들을 일본인들에게 파는 무역 루트였던 것이다. 주로 포항의 신광(神光)에서 만들어진 무쇠 도구들이었다. 이 오키섬의 '오키'는 우리말 '오기'가 일본화 된 섬 이름이다. 포항 영일만의 고대 이름은 '큰오기' 즉 '크게 오는 곳', '큰 항만'을 뜻하였고 일본 오키섬은 '작은 오기'를 뜻했다. '큰 오기에서 작은 오기'로 무쇠 도구를 가지고 오간 것이 이 고대 무쇠길의 진상이다. 우리말의 이 '오기'는 현재 '오키'라는 일본말 속에 살아있다. 일본말 '오키(沖)'는 난 바다 즉 '항구 어귀'를 뜻한다.

우리의 문물이 우리 조상의 손을 거쳐 일본에 가 정착했다. 그 증거의 하나가 이 '오키'라는 지명으로 지금껏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고대의 우리 지명 '근오기'의 '오기'가 일본 지명과 명사 속에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두자.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일본에 간 것은 무쇠 도구만이 아니다. 참 많은 인물들도 근오기 즉, 영일만을 통해 일본에 갔다.

첫손 꼽히는 인물이 연오랑·세오녀 부부다. 2세기의 이른 시기에 일본으로 간 이 고위층 내외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맨 마지막에 따로 자세히 취급할 생각이다. 이 내외를 두고라도 참 많은 고위층 즉, 왕, 왕비, 고관, 학자, 예술인, 기술자들이 잇따라 일본에 갔다. 일본에 가 일본국 건설에 이바지했다. 신라인, 고구려인, 백제인이 줄지어 갔고 그 중의 많은 이가 영일만인 근오기를 통해 출국했다. 가는 배편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망명이 아니고 단기간 그곳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 일본에 간 케이스도 많았다. 앞서 '오어사(吾魚寺)' 관련 글에서 밝힌 원효(元曉)스님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신라와 고구려계 인물의 태반이 근오기를 거쳐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의 역대 천황 중에 '오키나가…'라는 이름을 지닌 이는 어김없이 근오기, 즉 영일만에서 출국한 망명(亡命) 고위층이다.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참으로 많은 인물들이 한반도에서 일본 섬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왕명(王名) 중에 '타라시(足)'라는 명칭을 가진 임금은 8명이나 되는데 그 중 5명의 천황이 신라, 고구려, 백제에서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이요, 5명 중 3명이 큰오기 즉 영일만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다. 근오기에서 이즈모 코스를 택하여 일본으로 간 인물들이다. 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 타라시나카츠히코(足仲彦), 오키나가타라시히메(氣長足姬) 등이다.

이들은 중세 이전의 천황으로 되어 있으나 모두 7세기의 천황으로 알려진 천황이다. 일본이 '일본'이라는 국호와 '천황'이라는 왕호를 쓰게 된 것은 모두 7세기부터의 일이다. '타라시'라는 '망명왕'을 가리키는 왕호도 우리말에서 건너간 말이다.

6·25전쟁 이후 한동안 '삼팔 따라지'라는 속명이 나돌아 다녔다. 이북에서 삼팔선(三八線)을 넘고 월남해 온 사람들을 가리킨 '자칭(自稱)용어'였다. '삼팔'은 삼팔선을 가리킨 말이고, '따라지'는 '논들'을 가리킨 자기비하 용어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지'란 '달아난 사람'을 가리킨 비하용어로 여겨져 있지만 원래는 '급히 뛰는 사람' 정도의 뜻을 지닌 낱말이었다. 낱말이란 사회환경에 따라 엄청나게 비하(卑下)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유행어의 한가지다. 원래 '망명자'를 뜻하는 이 말이 시대와 사회환경에 따라 이렇게 '낮추어 지기도 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떻든 고위층 '달아치' 등의 몇몇은 근오기를 거쳐 일본에 갔다. 이 대항(大港)을 가리킨 근오기의 '오기'가 일본에 가서 '오키'라는 항만(港灣) 어귀를 가리키는 일본말 '오키(沖)'가 되었고, '오키아이'라는 '난바다', '앞바다'를 가리키는 말로 발전하기도 했다. 언어는 이와 같이 역사의 문화 수준을 따라 이동해가는 생물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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