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생겼는지 한 무리의 바람이
쌩하게 불어가면서 나뭇잎 하나를 때린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던 나뭇잎이 자기도 모르게
바람에 쓸려가는 중
수타사 입구를 지키는 가을을 비켜서서
눈에 덜 띄는 부도행렬처럼
죽어서도 저렇게 엄숙히 서 있어야 하다니
눈치없는 나뭇잎이 부도 위에 얹혔다
조용, 조용히,
좋은 시라면 이 근처 쯤에서는 독자들이
밑줄 그을 만한 문장 하나쯤은 감춰둬야 하는데
이 시는 그것 없이 맹탕으로 지나간다
속이는 척하다가 속이지 못하고
나만 속아버리면서 나를 향해 웃을 때
울울한 잡목림으로 사라져버린 바람의 흔적을 보며
알 듯 말 듯하게 서 있는 중
<감상> '좋은 시라면 이 근처쯤에서는 독자들이/밑줄 그을 만한 문장 하나쯤은 감춰둬야 하는데' 낙엽을 따라가는 가을을 바라본다. 훌훌 날리는 낙엽의 꽁지에서 가을은 그야말로 밑줄 그을만한 일 하나를 인간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 느낄 뿐 아닐까. 들과 산에 색색깔로 저렇게 밑줄 그은 가을이 있는데 말이다. (시인 하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