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가는 것은 깊게 기울어간다

아득함으로 넘어가는 생의 기울기

뜨거웠던 날들을 서늘하게 기울기

너에게서 나에게로 기울기

기우는 것들은 아무런 부측 없이 기운다

수수가 동쪽에서 피어 서쪽으로 기운다

동쪽에서 몰고 온 어둠이

부엉이울음 소리로 서쪽이 기운다

먼 길은 서쪽으로 나를 기울여 간다

서쪽으로 번지는 냄새나는 저녁

아이들은 동쪽으로 가는 잠에 들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동쪽 공부하고 선생은 서쪽 가르친다

어두워지면서 기우는 서산

검은 소처럼 매어 있는 어둠이 밤별 불러내는 되새김질한다

어둠의 과녁이 기울어야 별이 명중된다

드디어는 서쪽이 서쪽으로 기운다

<감상> 젊어서도 지금도 석양을 좋아한다. 서편으로 기운 가을 해의 긴 꼬리를 바라보는 일은 슬프기도 하고, 슬퍼서 아름답기도 하다. '서쪽으로 가는 것은 깊게 기울어진다.' 서편은 절명과 가까우면서도 절망이 아니다. '검은 소처럼 매어 있는 어둠이 밤별 불러내는 되새김질한다.' 되새기면서 내일을 다시 완성하려 하는 것이 서편의 힘이다. 누군들 서편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해도 서편으로 기운다. (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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