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비움 실천하는 아름다움 찾아오는 젊은이가 많을수록 노년은 성공한 사람일 터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이파리가 떨어져 나간 나목(裸木)이 겨울임을 말해준다.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절이다.

평범한 얘기지만 자연세계는 일년이 춘하추동(春夏秋冬), 하루가 아침, 낮,저녁, 밤이다. 인생도 아이, 청년, 장년, 노년의 네 마디로 나눠 볼 수 있다. 노년은 겨울이고 밤이다. 알프레드 테니슨이 82세 되던 겨울에 집 앞에 있는 큰 나무를 보고 쓴 시 '오크(The Oak)'다. "봄엔 찬란히 생생한 금으로. 여름엔 풍성하게. 가을엔 은근한 빛을 가진 금으로 다시. 모든 그의 잎은 끝내 떨어졌다 보라, 그는 우뚝 섰다. 줄기와 가지뿐인 나체의 힘." 인생을 4계절에 빗대었다.

테니슨은 겨울을 아니 노년을 적나라한 '나체의 힘(naked strength)'으로 묘사했다. 공자의 육십에는 귀가 순해지며(耳順), 칠십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웅변가이자 대문호인 키케로는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하다"며 원숙을 예찬했다. "내게는 '원숙'이란 생각이 너무나 즐거워, 죽음에 다가갈수록 마치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고는 항구에 입항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테니슨, 공자, 키케로의 노년은 그냥 나이만 먹고 밥만 축낸 껍데기 노년이 아니다. 말라비틀어져 쓸데없는 고목이 아니다. 용서가 있고 버리고 비움을 실천한 아름다운 노년. 그 노년은 용서다. 용서가 없으면 본인이 더 괴롭다. 그 노년은 무욕이다. 노년이 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욕망의 노예가 된다. 과일이 농익었을 때에는 저절로 떨어지는 게 순리다. 아직 난 젊다고 항변해보지만 나뭇잎은 피가 뜨거워도 겨울이 오면 떨어져 죽어준다.

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고 욕망의 노예가 되는 타락한 추노(醜老)가 우리 사회에는 의외로 많다. 일제강점기 구한국의 양반들 중에도 추노와 미노(美老)가 확연히 드러났다. 매국노 이완용과 칠십 노구를 이끌고 아직 봄인 스무 살짜리 아들과 압록강을 넘어 독립운동에 나선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의 삶은 선명하게 대조적이었다. 미(美)는 양(羊)과 대(大)로 이루어진다. 희생양이 클수록 아름답다.

노년이란 인생의 온갖 전투를 다 치르고 난 뒤 혹사한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다. 그런 노년이 할 일이 있다면 젊은이에게 값없이 거저 주는 것 뿐이다. 콩 보리(숙맥·菽麥)를 구별할 줄 알고 매운맛 쓴맛 다 본 노년이 아니던가. 겨울 내내 동토를 견뎌내며 자란 가을보리는 쌀이 떨어진 봄에 사람들의 목구멍을 채우고 입에 풀칠을 한다. 기꺼이 구명(求命)의 도구이자 희생의 수단으로 거듭난다. 1970년대 후반 충북 음성에서 반 거지로 살던 60대 후반의 최귀동은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거지들에게 밥을 얻어다 주는 일을 시작했다. 사명을 발견한 것이다. 스스로 보릿고개의 언덕이 되면서 세상에 알려져 1986년 카톨릭대상이 주어졌다.

발가벗고 순해지고 법도에 어긋남이 없고 원숙하고, 버리고, 비우고 그리고 희생을 자임하는 겨울보리 같은 노년은 아름답다. 권력의 옷을 벗어 던진 나체의 노년. 그 노년에게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공한 사람일터. 인생의 항해를 마치고 조용히 정박하려는 나체의 힘을 가진 노년, '미노'를 예찬(禮讚)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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