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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고대 수수께끼를 푼다-(16)한반도서 나지 않는 귀한 흑요석 찾아 日 건너간 '세오녀'

日 효고현엔 연오랑·큐슈 히메지마엔 세오녀 흔적 뚜렷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등록일 2014년12월11일 21시11분  
일본 시가현(滋賀縣) 여고호(餘吳湖) 호수가에 지어진 연오랑 마을 '여고(餘吳)'. '연오'를 본뜬 지명이다.

시가현엔 '연오' 본 뜬 '여고' 호수도 있었어

서기 157년 연오랑 日 망명 효고켄서 긴 칼 '기비' 제작

연오랑 세오녀 내외는 2세기의 포항에 실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연오항(延烏郞)은 신라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의 손자였고, 세오녀는 연오랑왕자의 왕자비(王子妃)였다. 이처럼 오래된 고대인의 이야기를 소상히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사(古代史) 이야기를 소상히 적어 남긴 역사학자들 덕분이다. 또한 연오항 세오녀라는 한국인 왕손 남녀를 각별히 존경하고 사랑한 일본인 서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한국인 내외는 역사적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호수를 메워서 논밭을 만들어 마을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연오랑의 공로는 지금껏 칭송받고 있다. 여고(餘吳)마을의 모습.

이를테면, '고리'라는 옛 상자를 한가지 보기로 들 수 있다. 연오랑은 일본에 가자, 껍질을 벗긴 고리버들 가지로 엮은 상자를 대량으로 만들어 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상자 크기에 따라 옷을 넣게도 하고, 밥도시락 통으로 쓰게도 했다. 고리버들로 만들었다하여 '고리'라 불린 이 상자는 그 후 '행리(行李)'라는 한자로 바뀌어 오래도록 일본인들의 쓰임을 받았다. 옷가지를 넣는 가방이 없었던 시절 이 고리버들 상자는 '고리짝이라 불려 가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연오랑이 오래도록 활약했던 일본 효고켄(兵庫縣) 북부 토요와카(豊岡)시는 현재 여행용, 또는 사무용 가방의 명산지로 명성을 높이고 있는데 원래는 '고리상자'라 불린 옛 가방 생산지였다. 이 토요오카시 이웃에 자리한 이즈시군(出石郡) 이즈시초(出石町)에는 연오랑을 받드는 사당 이즈시진쟈(出石神社)가 있다. 연오랑이 포항에서 일본으로 갔을 때 가져간 보물과 창(槍), 제사 지내는 신당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간직하고 있다는 서낭당이다.

일본 효고현(兵庫縣) 토요오카시(豊岡市)에 있는 기비신사(氣比神社).

이 근처에는 카네토코야마(철고산 718m)라는 철광석이 채굴되는 산이 있다. 연오랑은 처음 일본에 당도했을 때 먼저 이 산에 들어가 철광석을 캐내어 그 무쇠로 칼을 만들고, 이 고장 마루야마가와(丸山川)의 막힌 수문을 뚫었다 한다. 마루야마가와는 사철(砂鐵)이 흐르는 풍요한 강이다. 포항의 형산강에 해당되는 강이라 할 수 있다.

연오랑이 일본에 망명한 것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서기 157년) 때 일이다. 그리고 연오랑 동생 지고(知古)가 신라 제9대 휴벌왕이 된 것은 서기 184년의 일이니 30여년만에 재빨리 정권을 되찾은 셈이다. 여기에는 연오랑의 아내 세오녀의 힘도 크게 보태어졌다. 연오랑과 별도로 그의 아내 세오녀도 일본에 갔다. 큐슈(九州) 동쪽 쿠니사키(國東)반도 끝자락에서 6㎞ 더 간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 히메지마(姬島)까지 간 것이다. '보물섬'이라 불리는 고장이다.

일본 효코켄(兵庫縣) 이즈시쵸(出石町)에 있는 연오랑을 모시는 이즈시신사(出石神社).

흑요석(黑耀石)이 산출되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검고 단단한 유리를 닮은 흑요석은 화살촉, 칼날, 도끼날 등으로 사용된 고대의 중요한 석재(石材)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산출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귀한 흑요석을 찾아 2세기의 그 옛날 일본 큐슈의 외딴 섬까지 찾아간 우리나라 여인, 그녀가 바로 세오녀였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두루 보이는 기록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아달라왕 20년5월 대목에 '왜국(倭國)의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신라에 사신(使臣)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본서기' 등 일본 역사서 기록에 의하면 세오녀는 왜의 여왕 비미호의 딸로 치부되어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라로 간 비미호의 사신은 세오녀의 사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히메지마(姬島)의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을 연오랑 동생 지고(知古) 왕자(훗날의 휴벌왕)에게 보내주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당시 지고 왕자는 아달라왕과 전쟁하는 중이었다.

연오랑의 무덤이 있었다는 이즈시신사(出石神社) 안 금족지(禁足池).

어떻든 연오랑 동생 지고, 즉 휴벌왕은 아달라왕과의 싸움에 이겨 제9대 신라왕이 된다. 이 승리의 장막 뒤에는 일본에 간 연오랑 세오녀 내외의 큰 도움이 있었음을 짚게 된다.

포항 영일만 도구해수욕장에서 떠나, 똑바로 동쪽으로 향하여 항해(航海)하면 동경(東經) 133도선에서 오키(隱岐)섬을 만나게 된다. 이 해안지대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효고현(兵庫縣) 바닷가 해안국립공원이 나타난다. 이 해안지대가 바로 연오랑이 일본에서 머문 바닷가 마을 기비(氣比)다.

2015년 개원 예정인 '연오랑·세오녀 문화공원' 공사 진행 모습.

'기비'란 '긴 칼'을 가리킨 우리 옛말 '장도(長刀)'를 뜻한다. 칼 중애는 장도와 단도(短刀)가 있었다. 장도는 칼 길이가 길었고, 단도는 칼 길이가 짧았다. 칼 길이가 긴 장도는 임금이라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그 신분을 나타낼 때 또는 참싸움을 할 때 쓰게 되는 칼을 가리켰다. 따라서 '기비고'란 '긴 칼 창고'를 뜻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쓴 칼, 또는 참 전쟁 때를 위해 모아둔 칼 창고를 가리킨 낱말이었다.

연오랑이 일본에서 머문 바닷가 마을을 '기비'라 불렀다는 것은 연오랑이 그곳에서 기비, 즉 장도(長刀)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오랑은 일본에서 왜 장도를 만들었을까. 연오랑은 한국 땅 즉 신라에서 벌어진 참 싸움 때 쓰일 긴 칼, 즉 '기비'를 만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옛 상자. 주로 옷 같은 것을 담았다. 연오랑이 창안한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짧은 칼, 즉 단도(短刀)는 별로 쓸모가 없다. 연오랑은 전쟁용 칼을 잇달아 만들어, 배 편으로 영일만 근오기 바닷가로 연달아 보낸 것이다. 연오랑이 일찌기 기비를 만들어냈던 일본 효고킨(兵庫縣) 통요오카시(豊岡市) 기비(氣比)에는 지금도 '기비신사(氣比神社)'라 불리는 서낭당이 있어 긴 칼을 모시고 있다. 또한 효고켄 이즈시쵸(出石町)에는 연오랑을 모시는 대규모 신사(神社) '이즈시(出石)신사'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연오랑이 일본에 갈 때 가져갔다는 보물도 지금껏 모시고 있다 한다. 이 신사 경내(境內)에는 약 300평이나 되는 금족지(禁足池)가 있어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데 연오랑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라 한다.

한편, 일본 시가현(滋賀縣) 북방에는 여고호(餘吳湖)라는 큰 호수가 있었는데 연오랑은 이 호수 가의 큰 산을 무너뜨려 호수 절반을 메워서 드넓은 논밭을 만들어 인민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호수의 이름 '여고'는 '연오(延烏)'를 본뜬 명칭이다. 연오랑 이름은 일본 땅에 지금껏 살아 있는 셈이다.

'연오랑·세오녀 문화공원' 조감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129-1.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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