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효고현엔 연오랑·큐슈 히메지마엔 세오녀 흔적 뚜렷
시가현엔 '연오' 본 뜬 '여고' 호수도 있었어
서기 157년 연오랑 日 망명 효고켄서 긴 칼 '기비' 제작
연오랑 세오녀 내외는 2세기의 포항에 실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연오항(延烏郞)은 신라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의 손자였고, 세오녀는 연오랑왕자의 왕자비(王子妃)였다. 이처럼 오래된 고대인의 이야기를 소상히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사(古代史) 이야기를 소상히 적어 남긴 역사학자들 덕분이다. 또한 연오항 세오녀라는 한국인 왕손 남녀를 각별히 존경하고 사랑한 일본인 서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한국인 내외는 역사적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고리'라는 옛 상자를 한가지 보기로 들 수 있다. 연오랑은 일본에 가자, 껍질을 벗긴 고리버들 가지로 엮은 상자를 대량으로 만들어 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상자 크기에 따라 옷을 넣게도 하고, 밥도시락 통으로 쓰게도 했다. 고리버들로 만들었다하여 '고리'라 불린 이 상자는 그 후 '행리(行李)'라는 한자로 바뀌어 오래도록 일본인들의 쓰임을 받았다. 옷가지를 넣는 가방이 없었던 시절 이 고리버들 상자는 '고리짝이라 불려 가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연오랑이 오래도록 활약했던 일본 효고켄(兵庫縣) 북부 토요와카(豊岡)시는 현재 여행용, 또는 사무용 가방의 명산지로 명성을 높이고 있는데 원래는 '고리상자'라 불린 옛 가방 생산지였다. 이 토요오카시 이웃에 자리한 이즈시군(出石郡) 이즈시초(出石町)에는 연오랑을 받드는 사당 이즈시진쟈(出石神社)가 있다. 연오랑이 포항에서 일본으로 갔을 때 가져간 보물과 창(槍), 제사 지내는 신당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간직하고 있다는 서낭당이다.
이 근처에는 카네토코야마(철고산 718m)라는 철광석이 채굴되는 산이 있다. 연오랑은 처음 일본에 당도했을 때 먼저 이 산에 들어가 철광석을 캐내어 그 무쇠로 칼을 만들고, 이 고장 마루야마가와(丸山川)의 막힌 수문을 뚫었다 한다. 마루야마가와는 사철(砂鐵)이 흐르는 풍요한 강이다. 포항의 형산강에 해당되는 강이라 할 수 있다.
연오랑이 일본에 망명한 것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서기 157년) 때 일이다. 그리고 연오랑 동생 지고(知古)가 신라 제9대 휴벌왕이 된 것은 서기 184년의 일이니 30여년만에 재빨리 정권을 되찾은 셈이다. 여기에는 연오랑의 아내 세오녀의 힘도 크게 보태어졌다. 연오랑과 별도로 그의 아내 세오녀도 일본에 갔다. 큐슈(九州) 동쪽 쿠니사키(國東)반도 끝자락에서 6㎞ 더 간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 히메지마(姬島)까지 간 것이다. '보물섬'이라 불리는 고장이다.
흑요석(黑耀石)이 산출되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검고 단단한 유리를 닮은 흑요석은 화살촉, 칼날, 도끼날 등으로 사용된 고대의 중요한 석재(石材)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산출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귀한 흑요석을 찾아 2세기의 그 옛날 일본 큐슈의 외딴 섬까지 찾아간 우리나라 여인, 그녀가 바로 세오녀였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두루 보이는 기록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아달라왕 20년5월 대목에 '왜국(倭國)의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신라에 사신(使臣)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본서기' 등 일본 역사서 기록에 의하면 세오녀는 왜의 여왕 비미호의 딸로 치부되어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라로 간 비미호의 사신은 세오녀의 사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히메지마(姬島)의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을 연오랑 동생 지고(知古) 왕자(훗날의 휴벌왕)에게 보내주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당시 지고 왕자는 아달라왕과 전쟁하는 중이었다.
어떻든 연오랑 동생 지고, 즉 휴벌왕은 아달라왕과의 싸움에 이겨 제9대 신라왕이 된다. 이 승리의 장막 뒤에는 일본에 간 연오랑 세오녀 내외의 큰 도움이 있었음을 짚게 된다.
포항 영일만 도구해수욕장에서 떠나, 똑바로 동쪽으로 향하여 항해(航海)하면 동경(東經) 133도선에서 오키(隱岐)섬을 만나게 된다. 이 해안지대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효고현(兵庫縣) 바닷가 해안국립공원이 나타난다. 이 해안지대가 바로 연오랑이 일본에서 머문 바닷가 마을 기비(氣比)다.
'기비'란 '긴 칼'을 가리킨 우리 옛말 '장도(長刀)'를 뜻한다. 칼 중애는 장도와 단도(短刀)가 있었다. 장도는 칼 길이가 길었고, 단도는 칼 길이가 짧았다. 칼 길이가 긴 장도는 임금이라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그 신분을 나타낼 때 또는 참싸움을 할 때 쓰게 되는 칼을 가리켰다. 따라서 '기비고'란 '긴 칼 창고'를 뜻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쓴 칼, 또는 참 전쟁 때를 위해 모아둔 칼 창고를 가리킨 낱말이었다.
연오랑이 일본에서 머문 바닷가 마을을 '기비'라 불렀다는 것은 연오랑이 그곳에서 기비, 즉 장도(長刀)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오랑은 일본에서 왜 장도를 만들었을까. 연오랑은 한국 땅 즉 신라에서 벌어진 참 싸움 때 쓰일 긴 칼, 즉 '기비'를 만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짧은 칼, 즉 단도(短刀)는 별로 쓸모가 없다. 연오랑은 전쟁용 칼을 잇달아 만들어, 배 편으로 영일만 근오기 바닷가로 연달아 보낸 것이다. 연오랑이 일찌기 기비를 만들어냈던 일본 효고킨(兵庫縣) 통요오카시(豊岡市) 기비(氣比)에는 지금도 '기비신사(氣比神社)'라 불리는 서낭당이 있어 긴 칼을 모시고 있다. 또한 효고켄 이즈시쵸(出石町)에는 연오랑을 모시는 대규모 신사(神社) '이즈시(出石)신사'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연오랑이 일본에 갈 때 가져갔다는 보물도 지금껏 모시고 있다 한다. 이 신사 경내(境內)에는 약 300평이나 되는 금족지(禁足池)가 있어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데 연오랑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라 한다.
한편, 일본 시가현(滋賀縣) 북방에는 여고호(餘吳湖)라는 큰 호수가 있었는데 연오랑은 이 호수 가의 큰 산을 무너뜨려 호수 절반을 메워서 드넓은 논밭을 만들어 인민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호수의 이름 '여고'는 '연오(延烏)'를 본뜬 명칭이다. 연오랑 이름은 일본 땅에 지금껏 살아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