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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고대 수수께끼를 푼다-(17)고대부터 왕성하게 무쇠를 만든 제철터였다

무쇠·비단·쌀·소금·토기·어업…그 부(富)의 6점세트가 인구 백만의 신라 서라벌을 뒷받쳤다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등록일 2014년12월18일 21시19분  
POSCO 공장이 보이는 형산강 앞에서.

포항은 단순한 고기잡이 어항(漁港)이 아니었다.

포항은 고대부터 큰 항구였다.

많은 인재가 큰오기라 불린 영일만(迎日灣)으로 해서, 일본 당시 왜(倭)로 떠났다.

일본 땅은 농사가 잘되고, 나무가 잘 자라고, 숱한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사철(砂鐵)도 풍성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 넓고 풍요한 논밭을 갈아 벼 심고 거두는 법을 왜인들에게 가르쳤고, 사철을 강물에서 건져 불에 녹혀 두드려 칼·도끼·화살촉 등을 만들어 짐승을 잡는 법도 가르쳤다.

독도의 '대한민국 땅끝' 표시가 새겨진 조각 바위 앞에 선 이영희 교수(오른쪽에서 세번째).

이렇게 수많은 인재가 일본에 건너가 땅을 일구며 영토를 넓히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 지도자 급의 인물 중에는, 일본땅에서 기술자들을 키우며 살다가 우리나라에 되돌아와 더욱 발달되 기술과 지식으로 나라에 이바지한 사람도 있었다.

경주이씨(慶州 李氏) 시조 알평(謁平)공이 그 중 한 사람이다.

알평공은 원래 제철기술자였다. 늘 고대식 제철항아리를 허리에 차고 산을 타고 다녔기 때문에 표암(瓢巖)이란 호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경주시 산업로 4152-10번지에 있는 경주이씨 사당 이름이 표암제이다. 표암공은 포항에서 경주로 늘 산을 타고 다녔다.

경주 반월대 안 숲길을 돌아보고 있는 이영희 교수와 신라사(新羅史)에 정통한 김혁배씨.

신라 제 4대 탈해왕(脫解王)도 왜(倭)에서 포항으로 왔다. 키가 약 3척(1m가량)머리둘레가 1철(약 30㎝) 가량이었다 하니 '난장이' 크기였다고나 할까.

두뇌가 비상하여, 경주 반월대(半月臺)에 점지한 알평공의 제철(製鐵)터 집을 빼앗아 살았다.

제철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왕'이나, '고관(高官)'이 될 수 있는 시대였다.

잡초로 메워진 기계천을 침통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영희 교수.

고대의 신광(神光)도 대단위 제철단지였다.

신라 제 22대 지증왕(智證王)은 사철이 풍성하게 흐르는 신광 들판 냇가에서, 자신의 수하들에게만 제철을 하게했다. 당시 제철은 '국가 기밀(機密)'이었다. 고대 제철법(製鐵法)이 상세히 기록되어 전해지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지증왕에 의해 신광 제철터에서 쫓겨난 반대파 제철 기술자들은 일본에 갔다. 서기 503년의 일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신라식 제철법'으로 무쇠를 다루게 되었다.

경주 천마총 앞에서. 천마총의 피장자는 신라 제22대 지증왕이다.

서기 157년에 연오랑·세오녀 내외가 일본에 가서 한국식 공법으로 '기비'즉 '장도(長刀)'만들기를 가르쳐준지 3세기만의 일이다.

포항은 이와같이 고대부터 제철과 칼 등 무쇠 도구 만들기에 능통했던 고장이었다.

철기(鐵器)만이 아니라 비단과 소금만들기에도 능통했다. 무쇠와 소금은 특히 고대국가에 있어 긴요한 자산(資産)이었다. 무쇠만들기와 소금 만들기는 반드시 국가나 왕자가 관장했다.

울릉도의 암석(岩石) 아래 핀 연보라빛 해국(海菊) 옆에서. 해국은 울릉도를 대표하는 꽃이다.

연오랑은 신가 제4대왕 석탈해의 손자였다. 연오랑은 '왕자'였던 것이다.

연오랑이 이른 봄의 춘분(春分)날, 바닷가 바위에서 해초를 뜯었다는 기록은, 모자반이 소금을 만드는 데 쓰이는 해초였기 때문이다. 소금 만드는 데 쓰이는 모자반을 춘분날에 올려 제사 지내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이 바닷가 해초를 뜯고 있는데, 큰 바위가 와서 그를 싣고 일본에 갔다'는 기술은 연오랑이 소금 제조를 관장하는 왕자 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미곶 바닷가에 세워진 '청포도시비' 앞에서.

이와 같이 포항 바닷가에서는 일찍이 소금도 생산되었다.

특히 흥해에서는 소금과 더불어 쌀도 거두워졌다. 쌀은 신광에서도 생산됐다. 무쇠가 만들어지는 고장에서 거두워지는 쌀은 특히 맛이 좋기로 이름이 높다.

고대의 포항에서는 토기(土器)도 왕성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포항이 주산(主山)인 운제산(雲梯山)에서 양질(良質)의 진흙이 거두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소금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대량의 제염(製鹽) 토기는 이 산 아래 들판에서 구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기계에는 고인돌도 많다. 고인돌 옆에 기대듯 자란 200년 된 팽나무를 돌아보고 있는 이 교수.

고대 포항의 무쇠와 비단과 쌀과 소금과 토기 그리고 어업(漁業)….

고대 포항의 부(富)의 6점 세트가 인구 백만의 신라 서라벌을 뒷받침한 것이다.

그간 17회에 걸쳐 '포항의 고대 수수께끼'를 풀어보았다.

궁금증을 담아 읽어주신 포항시민 여러분과 내내 사진을 찍어주신 디지털 희망칼라 하홍걸 대표님, 그리고 제작 후원을 해주신 포스코의 김진일 사장님에게 깊이 감사 말씀을 드린다.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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