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낭만, 우린 이런 것들을 다 잊고 너무 살벌하게 살았다”

김주영 작가가 담담하게 새로운 소설에 대한 구상을 밝히고 있다. 프리랜서 전창욱

2015년, 을미년(乙未年) 새해가 밝았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 구조적인 모순과 병폐가 고질로 남아 있다.

경북일보는 문화와 정치, 행정, 경제계 등 각계의 명사들에게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타개할 수 있는 길을 묻는 '신년대담'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 첫번째 대담으로 소설가 김주영씨를 만나 근황은 물론,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와 삶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들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김주영 작가(왼쪽)의 집무실에서 김정모 논설위원이 대담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전창욱

-최근 근황은

△"객주 9권에 멈춰져 있다가 울진에서 보부상끼리 남아있단 연락을 받고 답사를 시작하면서 10권을 냈는데 완결까지 28년여 세월이 걸렸다. 청송에 폐교된 중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 객주문학관을 건립했다. 현재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기획분과위원장으로 회의에만 참여하고 있다."

-고희를 넘는 세월을 살아낸 우리 사회의 스승으로서 한 말씀한다면.

△"1939년 일제 말기에 태어났다. 태어나서 76년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세월이 더디게 가서 지루하다거나 따분하다거나 한 적이 없었다. 언제 한해가 가고 언제 10년이 갔는지 모르겠다. 일제에서 해방, 전쟁, 군사 혁명, 몇 번의 대통령이 지나갔고…. 이런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전쟁 때도 있었던 낭만, 또 한 가지는 저절로 누릴 수 있었던 혜택, 아름다운 자연, 따스한 햇살(추상적이긴 하지만) 어린 애 웃음에서 느껴지는 행복감, 가족이 함께 가는 여행에서 느껴지는 행복감, 낭만 이런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너무 살벌하게 살지 않았나 싶다"

-말씀 듣고 보니 우리 사회의 격동기를 다 겪으신 세대이신데요.

△"예, 그러면서 한 가지 내 스스로에게 참 다행스럽다 생각하는 것은 아주 혹심한, 치명적인 가난을 극복하면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온 거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 가난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그 가난의 때는 못 벗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매우 가난했다고 했는데 농촌에 살아도 논밭이 한 뙈기도 없었는지?

△"없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가 품팔이해서 먹고 살았다. 우리 집에는 쌀독이 없다. 그 때, 그 때 품삯을 곡식으로 받아서 하루하루 구걸하다시피 살았다. 호박, 감자, 고구마... 하루 하루가 위태로웠다. 전쟁도 겪고 그 와중에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행이다"

-소설을 쓰시면서 일관되게 견지해 온 정신적인 기조가 있다면.

△"첫째,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 역사의 행간에서 배제된 사람을 중심 주제로 삼았다. 우리 어머니는 일자무식이다. 국민학교도 안나왔다. 호적에 이름이 올라있었지만 이름 석자를 누가 불러주지 않는 사람도 없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면서 한 번도 역사의 전면에 이름을 내걸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내 소설의 주제였다.

둘째,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영웅보다 역사의 배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생을 감수했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 '홍어', '잘가요 엄마', '멸치' 등도 읽어보면 뚜렷한 주인공이 없다. 보통 역사 소설은 장길산, 연개소문, 강감찬, 세종대왕 등 영웅들이 소설의 제목이다. 객주에도 주인공이 없다. 굳이 있다면 끝까지 살아남은 전봉삼이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주인공이 없는 동시에 여럿이 있다. '멸치' 같은 한 권짜리 장편 소설의 경우도 물고기 중 가장 작고 사소하고 미약한 존재에 대한 애정이 있다. 아마 그것은 내가 자라는 풍토 자체가 많이 소외되고 왕따 당해서 우울하게 살아온 과거가 이런 소설을 쓰게 된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소설 '객주'의 독자들 중에 사회 지도층 인사도 많다. 그중에 독후감을 직접 들려준 사람이 있나.

△"김대중(DJ) 대통령과 청와대 토크쇼를 3번 했다. 청와대에 갔더니 DJ가 커피 3잔을 마시고 '감옥에 있는 동안 객주를 2번을 읽었다'며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다. 김우중 회장, 정주영 회장 등도 읽었다는 말을 했다."

-지난 9월 27일 '한중작가회의'가 중국에서 김주영 문학을 놓고 토론하는 '김주영 작품 연토회(硏討會)'를 열었다. 중국 문인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나.

△"중국의 유명한 비평가가 '이 사람(김주영) 소설에는 요사이 젊은 작가들이 쓰지 않는 자연에 대한 애정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어서 정감이 간다. 요사이 젊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늘 혼자 강가에서 미역 감고, 산에 가서 꽃 꺾으러 다니고 참꽃 다래 따서 먹고, 무밭에서 무 캐 먹고... 혼자 다니면서 자연과 굉장히 가까워졌다. 그것이 몸에 배어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상경 할 때도 일가 친척 없는 서울땅에 무작정 왔다. 날 위로해 주는 것은 산에 있는 나무뿐이었다. 지금도 산에 있는 울창한 숲들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자연을 친구로 생각하는 의식이 부지불식간에 작품에 나타나서 특징이 됐다"

-중국문인들이 항상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재로 쓴 선생님 작품에 대해 소위 '프로레타리아성'에 주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중국 소설가 위화가 쓴 '허삼관 매혈기'처럼, 중국에서 주목받는 작가, 주목받는 소설은 밑바닥 소외계층의 이야기다. 그 다음은 돈을 어떻게 버느냐에 대한 이야기다. '정글만리'같은 장사꾼 이야기다."

-청송 객주문학관의 운영과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서울뿐 아니라 대구, 포항, 안동 등 중앙, 지방 활동 작가들이 거기서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농사 짓고 있는 사람들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제도가 전무하다. 도회지 작가를 초청, 강연회를 할 수 있는 공간과 문학, 사진, 미술, 등산 교실을 올해부터 할 것이다. 문학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행사도 할 수 있도록 하겠다."

-'잘가요 엄마'에 담긴 이야기는 개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다. 어머니와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잘가요 엄마 서문에도 썼다. 어릴 때는 나는 어머니를 저주했다. 어머니를 저주한 이유는 어머니가 나를 방치했다. 교과서나 학용품 사준다든지 도회지로 유학 가는 것은 꿈도 못꿨다. 친구들은 고무신 신고 다니는데 난 맨발로 다녔다. 교과서가 없으니 가방도 있을 필요가 없었다. 빈손으로 학교에 다녔다. 벌로 키운 어머니를 원망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것이 내 인생에 굉장한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간섭을 안하니 내 마음대로 자유를 누리면서 상상력을 펴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맏이인 나에게 세 번이나 '무덤을 만들지 마라, 내가 너한테 해 준 게 없다. 어떻게 내가 너에게 무덤을 만들어 제사 지내기를 바라겠느냐.'했다. 당신께서 원하는 대로 화장해서 산위에 올라가 바람에 뿌렸다. 그런데 내 바짓가랑이, 내 구두위에 떨어지더라. 돌아가시면 멀리 가실 줄 알았더니 겨우 내 바짓가랑이에(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멀리 가시지 못했다. 인생이란 것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어머니도 마찬가지. 나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으니 나를 방치한 게 아닌가. 부잣집 아이들의 책을 옆 눈으로 보고 배웠다."

-내년에 발표할 예정이거나 구상하고 계시는 소설이 있나

△"65세쯤 되는 노인이 혼자 여행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우리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표현의 예술이라 할까 기술에 대해 특별한 방법이 있나.

△"아주 혹독한 가난이다. 나는 소풍 가는 날은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굉장히 흥분했다. 다른 이들의 도시락은 직사각형이나 타원형이다. 난 도시락이 없어서 소풍 가는 날 어머니가 뚜껑 있는 주발에 꽁보리밥과 감자를 삶아 넣어서 보자기에 싸줬다. 공처럼 둥그렇다. 소풍 가서 자갈밭에 모아놓고 기마전, 보물찾기, 축구하다 점심시간이 됐는데 내 도시락이 없어졌다. 모래밭을 헤매니 애들이 내 도시락을 가지고 축구하다가 선생님이 호루라기 부니까 놓고 가버렸다. 꺼내보니 모래가 반이었다. 감자를 꺼내서 물에 씻어서 창피하니까 바위 뒤에서 울면서 감자를 먹었다. '내가 아는 것은 전부 유치원 시절에 배웠다'는 책 제목처럼, 어린 시절 경험이 잊히지 않는다. 사회 나와서 한 것은 다 잊어버려도 어린 시절 경험은 죽을 때까지 뒤통수에 남아있다. 그것을 가슴 속에 그대로 놔두기엔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 그런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내면 좋은 소설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성이 메말랐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정신의 가치, 인간성 회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 중심으로 얘기하면 스스로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혹독한 가난을 겪었다는 것이다. 제대 후에 라면 2봉지로 하루를 살면서 6개월을 버틴 적도 있었다. 얼굴이 누래지더라. 그런 혹독한 가난, 혼자 살아온 가난과 소외감 속에서도 탐욕이 없었다. 사기를 쳐서 잘 살아보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정말 다행스럽다. 많은이들이 환경이 척박한 곳에서 살다 보면 탐욕스러워진다. 금전에 대한 물욕에 대한 탐욕이 강해지고 그럴수록 정신 세계는 황폐해져간다. 심지어 성직자까지 그렇다."

-지금 박대통령에게 진언하고 싶은 말씀은.

△"(한참 생각한 뒤)난 정치를 잘 모른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란 책에 있지만 창문 하나가 깨진 것을 고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방치했다가는 그 건물 자체가 범죄자의 소굴로 변한다. 워낙 많은 이들이 얘기하니까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창작활동은 계속 할 건가?

△"앞으로 계획이 연애를 할 생각이다. 거기서 얻은 경험이나 영감을 가지고 연애 소설을 써보고 싶다. 괴테가 78세에 동네에 있는 18살 먹은 아가씨를 좋아해서 계속 그 처녀에게 청혼했다. 하루는 수려한 외모의 귀부인이 찾아와 '당신이 괴테 선생님인가요? 당신이 청혼한 처녀의 어머니입니다. 제가 과부이니 차라리 저와 결혼합시다.' 괴테는 '내가 좋아하는 건 당신 딸이지 당신이 아니다'고 했다. 괴테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 처녀는 괴테가 남긴 사업을 거들면서 평생 수절하고 살았다. 괴테의 진정성에 감복했던 거다."

객주 시낭송회에 가야한다며 일어서는 작가에게 마키아벨리는 '만드라골라'라는 희곡을 써서 돈을 벌었다고 거들었다. "죽을 때까지 소설을 쓰겠다"고 답했다. 대작가의 조용한 열정을 보고 '객주'가 그저 나온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만년작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저녁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같은 열정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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