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경북 경산시
어떤 아름다움이든 긴장을 요구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을까.

그래서 긴장이 필요 없는 편안함과 미적 쾌감을 느끼고 싶다면 절집의 꽃살문 보는 일을 나는 감히 권하고 싶다. 문은 벽으로 차단된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장치다. 그렇다면 꽃살문은 신성한 부처가 있는 극락세계와 사바의 고통을 안고 사는 중생을 만나게 하는 문은 아닌가 싶어진다.

전나무 숲 그늘을 지나 내소사로 가면, 화려 하면서도 음전함을 지닌 매창 닮은 모란 꽃살문

이 있다. 줄포의 수런거리는 갯벌에 활짝 피어 붉디붉게 농익은 모란이다. 소금기 절절한 바

▲ 한국화가 남학호

닷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는 붉음은 아름다운 외로움이다. 여염집 처자의 단아한 동정 같은 운문사의 솟을 민 꽃살문은 해거름 내리는 시간, 어린 수도승을 눈물짓게 한다. 옥빛보다 푸른 머리, 가슴 봉긋이 부푸는 설레임은 아닐까. 봄날 한가로운 바람에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격자 매화 꽃살문은 범어사가 제격이다. 분을 바른듯한 연분홍 꽃잎은 부끄러워도 하지 않는다. 허리 굽은 긴 소나무 숲을 오르면 사랑만큼 아름다움 꿈이 어디 있느냐며 첫사랑의 안부를 물을 만큼 당당하다. 자색 연꽃에 앉은 동자의 몸무게가 궁금한 성혈사의 꽃살문은 개구리와 물고기까지 덧댄 재미가 마치 한편의 우화를 읽고 있는듯 하다. 그 선명한 색깔과 아름다움의 비밀이 자뭇 궁금해진다.

꽃살문은 대목이 불심 깊은 소목에게 맡겨 만든다. 재질이 단단하고 결이 부드러우며 향기가 온 방을 진동하는 붉은 소나무인 춘양목을 최고로 친다. 춘양목 중에서도 북쪽에서 100년이나 300년 정도 자라야 나이테가 촘촘해진다. 이것을 북 남풍 부는 쪽에서 다시 3년을 말려 4년째에 작업을 한다. 그런 다음 부식과 충해를 막기 위해 오방색으로 단청을 입힌다. 오방색 중에서도 부처의 세계를 의미하는 녹색은 석록이라 하여 제일 귀한 색으로 친다. 그래서 다른 색깔들이 다 벗겨진 뒤까지 가장 오래 남아 있다. 요즘 짓는 절집의 인스턴트 꽃살문에 비하면 오래 전에 보아 온 이러한 작업은 기술도 기술이려니와 정성이 없으면 만들 수 없다. 못 하나 치지 않고 꽃들을 피워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신기에 가깝다.

소목과 대목을 다 거친 아버지의 꽃살문 작업은 늘 나를 설레게 했다. 숨을 참느라 침 넘어 가는 소리를 낼 적마다 아버지는 "숨을 쉬면서 봐라 뭐 대단한 거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손은 이상하리 만큼 부드러웠다. 끌과 사포와 밥풀로만 작업하는 탓에 다른 이들의 손바닥은 덜 깍은 턱수염 같았다. 춘양목 냄새 가득 베인 푹신한 아버지의 손바닥은 어린 내가 코를 대고 킁킁거리거나 볼에 부벼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공작석과 꽃무릇, 황토와 치자, 감, 옻으로 빻고 으깨어 내는 색깔들을 나는 좋아했다. 치마 끝단을 알록달록 물들이는 바람에 혼도 많이 났지만 물이 조금 빠진 다음의 색깔에 혼자 만족하곤 했었다. 절집 공사가 거의 초가을에 이루어진걸 보면 자연에서 얻는 색과 꽃들이 피는 아름다움을 그들은 체험으로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오랜 세월을 지키는 꽃살문은 바랜 색 만큼이나 신비롭다. 내게 꽃살문은 중풍 들어 힘없는 손을 가진 늙은 아버지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 앞에 서면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나고 마음에 평화가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처럼 가을이 은행잎 되어 떨어지는 날 생각나는 하나의 꽃살문이 있다. 가을 햇볕에 잘 익은 색깔의 이파리들을 모아, 창호지에 싼 다음 무거운 다듬잇돌 아래 말렸다. 이렇게 해마다 잎들을 모아 두었다가 새로 창호지를 바를 때 창살 중간마다 겹으로 붙여 발랐다. 그러면 응달에서 창호와 함께 빳빳이 당겨져 말린 꽃잎이 꽃살처럼 박혔다. 문틈으로 달빛이 비치는 밤에 바람 소리만으로도 수십 송이의 꽃들이 피어나던 기억을 차마 잊을 수 없다.

이렇듯 저마다의 다른 색과 모양을 한 꽃살문은 우리들 가슴에도 분명 있으리라. 어떤 것들을 구분하여 열리고 닫히는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뿐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보고 느끼고 행하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모으는 마음의 꽃살문은 자신의 어디쯤 달려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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