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광의 시인

우리 시는 많은 변모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시인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요즈음, 시가 난해하다 못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고 마는 시들이 많다. 시가 의미 있는 것이 되자면 난해할지언정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좋은 예로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보면, 흰 돛단배들이 떠 있는 지중해를 비둘기들이 거닐고 있는 기와지붕에 비유한 첫 행의 이미지는 얼마나 눈부실 만큼 정밀하고 치밀합니까. 이와 같이 시가 난해해도 그 의미가 시의 보편성의 어느 언저리에라도 닿아있어야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 될 뿐 아니라 또한 기존의 우리 시의 보편성의 테두리를 넓혀주는 구실을 하게 된다.

예심에서 넘어온 작품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은 '정열식물원', '기억 분실', '유전 혹은 유혹', '뿔의 기억'이상 네 편이었다. 이 가운데 '유전 혹은 유혹'과 '뿔의 기억'은 시법(詩法)이 독특하고 개성적인데 반해,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 난해하고 모호한 문장들은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언어의 쇄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내는 큰 안목을 갖추어야 비로소 독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기억 분실'은 다소 거칠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매끄럽거나 산뜻하게 정리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대상을 투시하는 눈이 날카롭다. 상상력도 풍부하다.

조영일 시인

'정열식물원'은 시각이 미세하고 미명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뛰어난 언어구사는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확인시켜 준다. 다만 이 작품의 시적 성취도를 다소 방해하는 난해시적 요소―예컨대, '쇼윈도우 저 편, 알몸으로 진열된 내가 / 또 몇 개의 나로 분재되고 있네'와 같은 구절을 걷어낸다면, 이 시의 완벽성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좋은 시인의 출현을 축하하며 대성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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