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아이들 300명 버려져 사회가 책임 못지는 부분은 개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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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목 영남대 교수
어릴 적 고향 읍내를 지나노라면, 늘 귓전을 때려댔다. 저음 가수 배호가 부르던 '생일없는 소년'. 1966에 나온 영화의 주제가다.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버렸나요/한도 많은 세상길에 눈물만 흘립니다/동서남북 방방곡곡 구름은 흘러가도/생일 없는 어린 넋은 어디메가 고향이오.//어머니 아버지 왜 말이 없습니까/모진 것이 목숨이라 그러나 살겠어요/그리워라 우리 부모 어드메 계시온지/꿈에라도 다시 한 번 그 얼굴을 비춰주오.' 눈물이 핑 도는 이 노래는 '버리고 떠남' '헤어짐'의 슬픔을 토로한 것이다.

씻김굿처럼, 아니 빗자루처럼, 한 시대의 한을 노래가 쓸고 다닌다. 1957년께에 나온 '해운대 엘레지'도 그렇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헤어지지 말자고/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너와 내가 아니냐/세월은 가고 너도 또 가고/나만 혼자 외로이/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못 잊어 내가 운다' 종전 후 1956년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단장(斷腸)'처럼, 쓰라린 이별은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 아닌가. 사랑하지만 이별해야 하는 고통, 애별리고(愛別離苦)는 격동의 우리 역사 속에서 '피눈물'로 '정(情)'을 터치한다.'당신이 날 버리고 말없이 떠났을 때, 이 몸은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렸다. 어차피 가실 바엔 정마저 가져가야지, 정만을 남겨두고, 어이 홀로 떠나갔느냐' 박일남이 1971에 짓고 부른 노래 '정'이다.

중국 고대의 '시경'에서도 이곳저곳 헤어짐의 비통이 쩔어있다. 우리의 트로트 같다. '끝내 형제를 멀리 떠나 남을 아비라 부르지만/나를 돌봐주지 않고, 남을 어머니라 부르지만 나를 가까이 하지 않고, 남을 형이라 부르지만 나의 말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네'<-칡덩쿨(葛葛)>.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버렸나요/한도 많은 세상길에 눈물만 흘립니다'라는 심정과 무엇이 다르랴. 또 '시경'에는 개탄한다. 부모와의 헤어짐 같이 '나 태어난 후에 이 숱한 흉사를 만났으니 아예 잠들어 들리지 말았으면(我生之後, 逢此百凶, 尙寐無聰)' <-토끼는 깡충깡충 뛰는데(兎爰)>하고. 토끼조차도 안 걸리는 이 고통의 그물에 내가 딱 걸려들어 이 모진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홀로된 아이들은 평생 이런 생각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가족이나 미혼모로부터 외면당하는 등 여러 사연으로 부모와 헤어져 홀로 된 아이들. 고아(孤兒), 기아(棄兒), 미아(迷兒). 사회적 약자들이다. 자립하는 일정 연령대까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세계의 고아가 자그마치 1억5천여만명이고, 이 가운데 우리 아이들도 100만명 이상. 3만여 고아원이나 보육원에서 양육되고 있단다. "불가피 하게 키울 수 없는 장애로 태어난 아기와 미혼모 아기를 유기하지 말고 아래 손잡이를 열고 놓아주세요" '베이비박스(baby box)'에 적힌 글귀다. 한해 300명의 아이들이 버려지는데 베이비박스에 한달 평균 25명이 담긴단다. '유기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기아'도 증가하고 있다.

현실을 외면하지 말자. 우리 사회가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은 모두 개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 아닌가. 그렇다면 홀로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홀로서기의 정신적 기반에 대해 우리사회는 좀 더 고민하고 공부하게 해야 한다. '독락(獨樂)'의 용기와 그 인문적 노하우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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