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다가온 새 봄 생명의 기운 마시고 온몸으로 봄을 느끼자

▲ 김일광 동화작가
새 봄이다. 노고지리처럼 재재거리는 아이들의 어깨에 묻어서 봄은 온다던가? 마른 나무 등걸에서도 싹이 돋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이랑마다 봄은 어김없이 다가와 푸른 생명을 깨우고 있다.

조금 느리게 살면서 지나쳤던 책이나 읽어 보려고 시골에 작은 집을 하나 구했다. 마침 딸린 작은 텃밭이 있어서 어설프게 농사를 시작한 지 2년이 되었다. 봄볕이 차츰 두꺼워지는 날, 텃밭에 나갔다. 어릴때 농사를 짓던 부모님을 따라서 밭 자락을 드나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부모님은 일을 시키시지 않았다. 고생스러운 일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부모님 덕에 밭일은 영 낯설기만 했다. 이랑을 만드는 것부터 백 가지를 이웃 할머니들에게 물어야만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는지 골목을 지나는 할머니마다 한 마디씩 훈수를 들곤 했다.

올해는 무엇을 심을까. 이랑을 밟으며 풋것의 가짓수를 가늠해 보다가 문득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봄을 느낀다. 겨울을 이겨낸 부지갱이나물, 치커리, 부추, 방풍의 푸른 몸짓이 갯바람과 맞서고 있다. 겨울 동안 얼어붙었던 땅, 그 죽음의 자락에다 누가 이 생명들을 숨겨 놓았던 것일까? 봄은 이렇듯 우리에게 생명의 경이로움을 가르쳐 주는 큰 스승임에 틀림없다.

봄이라는 말은 불 '火'의 옛말 '블'과 오다 '來'의 명사형인 '옴'을 조합한 '블+옴'에서 'ㄹ'받침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한다. 즉 봄은 밝고 따뜻한 기운이 다가온다는 뜻이란다. 또 이와는 다르게 봄을 보다 '見'의 명사형인 '봄'을 그 어원으로 보기도 한다.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나면 가녀린 가지마다 새 움이 트게 된다. 그래서 눈을 뜬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리라. 정녕 새봄이란 이 위대한 섭리로 펼쳐지는 밝고, 따뜻하고, 조화롭게 소생하는 생명의 모습을 '새로 본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한 해에 길이가 엇비슷한 네 개의 계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여름, 새가을, 새겨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계절은 없다. 그러나 봄만은 해마다 새봄으로 부른다. 또 그렇게 불러야 봄나물처럼 말에서 향기가 난다. 봄비를 두고 흔히들 봄을 재촉하는 비라고 한다. 그만큼 봄은 우리들에게도 새롭게 변화하기를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시간의 변화에 눈 뜨지 못한 채 굼뜬 봉충다리를 하고 있다.

거름을 넣는다. 지난해까지는 이웃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가 거름을 나누어 주었다. 텃밭을 가꾸겠답시고 어슬렁거리는 게 영 미덥지 않았던지 거름 뿐만 아니라, 모종, 씨앗, 심지어 소소한 농기구까지 챙겨주었다. 그 덕에 2년은 잘 넘겼다. 그러나 더 이상 친구의 손길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내로 나가는 길에 종묘상에 들러서 거름 몇 포를 샀다. 가게 주인이 '못된 벌레들이 귀찮게 할 건데요' 라며 약봉지를 내밀었다. 살충제란다. 나는 잠깐 동안 흔들렸던 마음과 함께 그 약봉지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 잠깐의 흔들림! 회색빛 욕망의 공간에 갇혀서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챙기느라 허덕대는 나의 못난 모습이 송곳처럼 올라온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들킬 새라 황급히 가게를 빠져 나왔다.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 쉰다. 어느새 다가온 새봄이다. 생명의 기운을, 봄을 마신다.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봄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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