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얼굴에 책임 져야하고 '삶의 기술'을 터득할 시기 홀로서기 훈련을 시작할 때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내일 모레 오십이다…환갑이다…." 대놓고 나이 타령을 시작하면 약해졌다는 말이다. 체력이 딸리거나 말빨이 안 서니, 자식이나 젊은 애들 앞에서 슬슬 '나이' 카드를 꺼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서글픈 일이다. '나이 따짐'은 자연을 질서와 권위로 인정하자는 것. 나이가 많고 적고에 따라 '위 아래'를 정하는, '찬물에도 순서가 있다'는 전통 관례 '장유유서'(長幼有序)에 슬쩍 무임승차 하고 싶어진 것이다.

'연장자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전통사회의 불문율이니, 아래가 위를 존중하는 룰을 침해해선 안 된다. 이것을 '범상'(犯上)이라 했다. 자연 질서인 '나이 따짐'은 사회 질서인 '직급 따짐'과 다르다. 단 1초라도 먼저 태어나면 위(연장자)다. 집 안팎에서 아우 되는 자는 아무리 잘났더라도 형 앞에서 일단 고개를 숙이라는 것, 그래야 버르장머리가 있다는 소릴 듣는다. 이것이 '상치(尙齒)' 즉 나이든 자=연장자(齒)를 존중하는(尙) 유교 전통이다. '맹자'에 나온다. "세상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표준이 있다. 지위(爵)와 연령(齒)과 덕성(德)이다. 지위는 국가의 관료체계(朝廷)에서, 연령은 사적인 향촌사회(鄕黨)에서, 덕성은 공적인 질서유지(保世長民)에서 추켜세우는 개념이다."

치아(齒)는 인간의 생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임플란트 같은 인공 기술이 없던 때, 자연 치아의 상태를 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치아는 바로 '나이'='순서'를 상징하였다. 이런 레퍼토리의 능선에 순망치한(脣亡齒寒) 같은 착한 문구도, '경로(敬老)'의 전통도 어엿이 자리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고, 중국에서는 "노인 말 안 들으면 수명이 10년 줄어든다"고 하였다. 모두 나이 존중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노(老)를 '쇠퇴'나 '쇠약'에서가 아니라 '노숙'과 '노련'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사실 '나이 듦(Aging)'에는 '축하-기쁨'과 '두려움-슬픔'이 공존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말한다. "부모의 나이를 알아야 한다. (나이를 기억해둔다는 것은)한편으로는 기쁜 일이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다(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부모가 오래 사신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하지만 쇠약해지니 늘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한다. 공자 자신의 인생 단계를 술회한 것이다. 금전이나 이성 문제, 정치적 스캔들 같은 판단착오나 실수를 일으키지 않는 경지에 당당히 올라섰다는 선언이다. 공자는 평생 10년 단위로 큰 자기발전을 이뤄갔다. 불혹이란 말에는, 마흔이 되면 제발 그에 걸맞게 '꼴값 좀 하라!'는 따가운 질책이 숨어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마흔이란다. 비로소 불혹의 나라가 됐다. 개인도 사회도 이제 자기 얼굴에 각기 '책임'을 져야할 때다. 철저한 자기관리 말이다. 공자는'논어'에서 또 한 마디 보탠다.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그대로 끝장난 것이다(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뜨끔한 일갈 아닌가. 마흔이란 '삶의 기술' 터득에 막 눈 돌릴 시기이다. 돈, 사람 그 어느 것에도 기대지 말고, 홀로 우뚝 서는 연습, 홀로서도 즐겁게 잘 챙겨먹고, 걷고, 생각하는 훈련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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