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은 '워터게이트'로 대통령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하지만 대통령 재임 때 과감한 결단력으로 1970년대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닉슨은 국제정치가 양극화에서 다각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같은 국제정치의 지각변동에서 미국이 맹주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선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가진 중국을 국제무대에 끌어들이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중국과 화해를 모색하는 길에는 숱한 걸림돌이 가로놓여 있었다. 소련의 반감, 대만의 민감한 반응, 일본의 견제, 그리고 미국 보수파들의 반대를 극복하는 것이 무거운 짐이었다. 이런 난제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중국을 더 이상 국제무대에서 고립되게 할 수 없다"는 외교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하는 대 결단을 내려 '죽의 장막'의 문을 열게 했다. 닉슨의 중국행은 세계 평화 구축의 거대한 발걸음이 됐다.

닉슨은 이스라엘을 지지했지만 1억 아랍권에 둘러 싸여 있는 이스라엘이 불안했다. 중동을 덮고 있는 전쟁의 먹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닉슨은 아랍권을 달래기도 했다. 1974년 중동순방길에 나선 닉슨은 사다트 이집트대통령을 만나는 것을 비롯, 아랍권 국가들과 잇단 정상회담을 열어 전쟁위험을 해소시켰다. 닉슨의 아랍권 순방 결단은 중동에 대한 지구촌 불안을 완화하는 촉진제가 됐다. 소련이 쿠바에 핵잠수함 기지를 구축하려 하자 닉슨은 소련을 위협하는 과감한 결단으로 소련이 계획을 포기하도록 했다. 국제정치에 큰 획을 그은 이 같은 일련의 외교정책의 성공으로 1971년과 72년 연거푸 타임지의 '그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역사에선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이 한 나라의 운명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사례를 더러 본다.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 배치문제를 놓고 정부가 딜레마에 빠져있다. 배치를 원하는 미국과 반대하는 중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락가락하고 있다. '사드'는 북핵 억지 차원에서 우리가 결정할 문제다. 이럴 때 '신의 한수'는 대통령 결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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