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도둑 기차 탄 마음의 빚 갚기 위한 것

▲ 이병석 국회의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의 한 소절이다. 사람에게 '알'이 있고, 알을 담은 '내장의 뒤틀림'이 아리랑의 모습이라고 한다. 눈물고개며 보릿고개가 아리랑 고개이며, 아프다 못해 '찌르듯 아프고 쓰라린 고개'라고 한다.

나에게 '아랑'은 '철도'요, 그를 노래하는 '아리랑'이 '철도아리랑'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먹고살기 너무 힘들어서 혼자 힘으로 더 넓은 세상에서 삶을 개척하고 큰 일꾼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가출을 했다. 12시간 넘게 도둑기차를 탄 것이다. 포항에서 밤새 기차를 타고 경주를 지나 서울로 올라갔다. 차장이 표를 체크하러 올 시간이면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 난, 몸집이 작아서 의자끼리 등을 맞댄 틈새에 숨어서 폭격을 모면했다. 객차와 객차 사이로 도망쳐서 바깥부분의 손잡이를 잡고 매달리기도 하면서 목숨을 건 도둑기차를 탔던 것이다. 하여 철도는 나에게 '찌르듯 아프고 쓰라린 고개'를 넘게 해준 '희망의 아리랑'이다.

1918년 포항 최초로 조그마한 간이역이 세워지면서 처음 기차가 달렸다. 포항철도도 아리랑이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나고, 끊어진 철교 위에서 부르다 못다 부른 아리랑이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건설을 위한 장비를 싣고 내리며 부르던 아리랑이다. 경주역에 매미처럼 붙어서 해방 후 부단히도 서울로, 직통으로 바로 갈 수 없는 철도를 안고 한(恨)을 견디며 부르던 아리랑이다. 그렇게 100년이 지났다.

초선으로 당선 되자마자 나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포항철도의 한(恨)을 이야기 했다. 2000년 10월 27일 국회 첫 국정감사 경상북도 감사장에서 포항에서 삼척으로 올라가는 동해중부선 철도부설을 주장했다. "도지사께서는 경상북도와 강원도 100만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동해선 철도의 조기부설을 위해서 부산~울산~경북~강원도 간 특별추진협의체를 구성할 용의가 없는지 여기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그 당시는 포항의 영일만 신항 개발 자체가 국가 정책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면서 지지부진하고 있을 때였다. 계속해서 포항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다시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부설을 주장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실현가능성이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2007년 12월말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계수조정위원회 위원으로서 예산·결산 심의를 할 때, 결국 500억 원을 별도로 계정해서 동해중부선을 2008년 3월에 착공, 동해안 시대를 여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또 무엇보다 1천 232억 원의 추가예산을 통해 '포항~서울 간 KTX 직통노선'을 확정하고 설계변경을 시작했다. 본래 포항~서울 간 KTX 연결은 2010년 말에 완공되는 '동대구~부산 간 2단계 경부고속철도'와 연결해서 신경주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포항으로 들어오는 지금 현재의 모습이었으나, 국토해양부에 강력하게 계획변경을 요구해, 신경주역 북쪽에서 조기 건설될 모량 근처의 동해남부선 일반철도(신경주~포항)까지 연결하는 '4㎞의 연결선'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실질적인 KTX 직통선 건설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울까지 2시간 10대로 소요되는 반나절 생활권으로 서울과 포항 그리고 동해안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고 포항시민으로서 삶에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나의 철도아리랑은 계속되었다. 내가 이렇듯 철도아리랑을 쉼 없이 노래하는 건, 그 어렸을 때 도둑 기차를 타던 때의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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