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자-언어 형식은 가상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도 그때그때 만의 진보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방의 머리맡에 어지러이 흩어진 책들. 서재 이곳저곳 삐뚤삐뚤 쌓여 높아만 가는 책들을 쿨 하게 태워버릴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여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 책에 미련이 많다는 것. 더 이상 쌓아둘 곳은 없는데, 태워버리기는 아깝고, 계륵 같다.

태워버려야 할 책 '분서(焚書)', 묻어버려야 할 책 '장서(藏書)', 이런 아주 폼 나는 책을 쓴 사람이 있다. 명대 말기 진보적인 양명학자 이지(李贄)다. 양명학을 갈 데까지 밀고나가, 그 벼랑 끝에서 책-지식으로 덮을 수 없는 인간의 밑바닥에, 시퍼렇게 빛나는 진짜 마음 '진심(眞心)-동심(童心)'을 발견한 사람이다. 이 정도 되니 책에다 자신을 슬쩍 숨기고 타인의 문자를 빌어 가식적으로 앵무새처럼 제법 그럴 듯하게 '체'하며 멋진 거짓말을 해대는 사이비 지식인을 '짜가'(가짜·거짓)라 몰아붙이며 '태워버려야 할 책'운운 할 만하다. 물론 '분서'하면 대선배가 있다. 진나라 시황제다. 자신의 정치 버전에 맞는 실용서 외의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흙구덩이에 생매장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이것이 픽션이라는 설도 있지만, 여하튼 책을 '불태운다'는 것은 기존질서-문명체계에 대한 거역, 반항, 이의제기를 상징한다.

불교에서는 경전을 '밑 닦는 휴지', '우는 아이 달래는 종이 돈'이라고도 한다. 책-문자-언어라는 형식은 가상, 방편이라는 이유에서다. 부처를 '뒷간의 똥막대기'라느니, 심지어는 법당의 목불을 도끼로 쪼개서 아궁이에다 불쏘시개로 쳐대면서 "사리가 나오지 않으면 부처도 아니지"라 중얼댄다. 그뿐인가, 석가가 태어나자 일곱 걸음을 옮기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쳤다는 대목을 두고,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를 때려 죽여 굶주린 개에게 던져주었을 것을"이라는 막말을 해대기도 한다. 장난이 아니다. 진리는 꼭 석가에게만 있지 않다는 치열한 구도행위 끝에 던진 절규들이다. 모두 이런 '마지막 한마디'(末後句)를 찾아 나서, 그 눈물어린 구도의 행보 끝에 짚은 경지다. 누구나 살면서, 유언이나 가슴 깊이 꼬불쳐 둔 이별인사 같은, '마지막 어휘'를 찾고 싶어 한다. 책을 읽고 진리를 만나러 가는 이유다. 모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이리도 작아지는가'라며 징징댄다. 그 마지막 어휘를 찾고서 기뻐하는 순간도 잠시. 다시 수없이 '정신적 경련'(mental cramp)을 일으키며, 맨바닥으로 미끄러져 나가 떨어진다.

남명 조식의 문인 덕계(德溪) 오건(吳健)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스승 남명을 찾아가 중용을 배우기에 앞서 혹시 실수나 할까 두려워, 그것을 무려 3천 번이나 읽었단다. 아, 한번 생각해보라! 3천번을 읽는 그의 가슴속을 명멸하던, 무량무량한 번뇌의 굴자들을.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 만의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라고 말한 철학자 벤야민의 말을 기억하자. 학문의 진보란 뭘까.

얼마 전 17세의 학생이 책을 태우다 불을 낸 일이 있었다. 서울 어느 아파트 옥상, 연기가 자욱이 오르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묻고 싶어졌다. 분서(焚書), 그 오래된 슬픈 책들의 화형(火刑)을, 그는 왜 기어코 보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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