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병법(吳子兵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는 노나라, 위나라, 초나라를 전전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노나라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오기는 혁혁한 전공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오히려 그에겐 악재로 작용했다. 오기의 명성을 시기한 중신들의 반동으로 노나라서 쫓겨난 오기는 신흥국가인 위나라로 건너갔다. 부국강병을 추진하던 위나라 문후에게 발탁된 오기는 군을 통솔하는 대장이 됐다. 76번 싸워 64번의 전승을 거둔 오기는 위나라 영토 확장의 일등공신이 됐다.

오기는 군사에도 뛰어났지만 정치적 능력도 탁월했다. 오기의 쇄신정책을 밀어줬던 무후가 사망하자 보수파들이 정권을 장악, 오기를 핍박했다. 보수파들의 공세에 쫓겨 초나라로 간 오기는 초나라 도(悼)왕의 신임을 받고 재상자리를 꿰찼다. 초나라 재상이 된 오기의 활약은 눈부셔서 초나라 부흥에 큰 업적을 쌓았다.

오기의 개혁정치는 후진국이었던 초나라를 일약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6년 후 도왕의 급사로 오기의 운명도 위기에 몰렸다. 오기의 강력한 혁신정치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특권 등 대대로 누려오던 기득권을 박탈당했던 귀족들은 도왕이 죽자 오기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은 세력을 규합해 오기를 죽이기로 했다.

귀족들은 가신들을 이끌고 오기를 기습했다. 오기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살아날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와 같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병법가인 오기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을 죽인 무리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책략을 생각해 냈다. 오기는 귀족무리들이 활을 쏘면서 몰려들자 도왕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곳으로 달려가 시체를 덥석 껴안았다. 무리들이 쏜 화살들은 오기의 등을 뚫고 도왕의 시신에 꽂혔다. 당시 왕의 시신에 상처를 입히는 자는 참형에 처했다. 오기의 암살에 가담한 귀족과 가신들 모두 처형됐다.

친박 실세들만 찍어 뇌물메모를 남긴 성완종 회장의 자살극은 마치 오기의 '죽은 자의 복수'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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