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서 배우기보다는 보이는 대로 지적질하며 가르치기를 삼가해야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나이 들면 바뀌는 게 두어 가지 있습니다. 쉽게 친구가 되고, 남에게 보이는 일에 많이 무심해집니다. 보고 보여지는 일에 너그러워진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변화가 매번 좋게만 여겨지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노추(老醜)가 되는 일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면서 '보고 보여지는' 일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검도에는 '일안(一眼), 이족(二足), 삼담(三膽), 사력(四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의 중요성, '보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보기'와 관련해서는 관(觀)의 보기와 견(見)의 보기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숲을 보는 것과 나무를 보는 것의 차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고, 심리적, 기세적 차원에서 마음으로 상대를 보는 것(心眼)과 육안(肉眼)으로 상대의 동작을 세밀하게 체크하는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도 있습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통시적, 맥락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관', 상대의 한 동작 한 동작을 잘라서 보는 것은 '견'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습니다. 오늘 주역 스무 번째 괘인 '풍지관(風地觀)', 관괘(觀卦)를 보며 '보기'의 새로운 경지를 하나 더 생각해 봅니다. '(내가 남한테) 보이는 것을 보기'라는 것입니다. 상대만 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는 노력, 상대에게 자기가 어떻게 보여지는 지를 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관관(觀觀)의 보기'라고나 할까요?

구오는 나의 움직임을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으리라.(九五 觀我生 君子无咎)

상구는 그 움직임이 보여지되 군자면 허물이 없으리라.(上九 觀其生 君子无咎)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75쪽'

'관아생(觀我生)'은 스스로 자신의 도를 보는 것이요. '관기생(觀其生)'은 그 도가 백성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관아생', '관기생', 그 두 개의 '관'을 통해 스스로 허물없기를 노력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반성적 성찰을 행하며 쉼 없이 움직여 나가야 생(生)이라 할 수 있다고 주역은 덧붙입니다. 검도 수련에서도 꼭 명심해야 될 '보기'의 계명인 것 같습니다. 산다는 것이 복잡하기도 하지만 의외로 단순 명료할 때도 많습니다. 한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 곧 천하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네 이웃이 곧 세계다'라는 토플러의 말이 추구하는 것도 결국은 '관아생, 관기생'의 경지와 한 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도(道)의 본질을 벗어나 승부나 폭력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 무도 수련입니다. 말이 쉽지 생각보다 '관관(觀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맞으면 때리고 싶고, 자리에 오르면 군림하고 싶습니다. 찾아서 배우기보다는 보이는 대로 지적질하며 가르치기를 즐겨합니다. 내 허물을 바로잡기보다는 남의 허물을 탓하기가 쉽습니다. 현재까지 제가 보아온 바에 따르면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저까지 포함해서 입니다. 수련을 통해 그런 소아병(小兒病)들을 넘어서야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관관(觀觀)의 보기', 앞으로 자주 다짐해야 할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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