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순리로 모든 것 진행 이권-권력도 안갯속 아닌 공개된 장소서 짝짝꿍해야

▲ 최재목 시인·영남대철학과 교수
1971년 가수 배호가 죽은 뒤, 40여년 만에 발견된 미발표곡 '밤안개 속의 사랑'을 생각한다. 취입은 했으나 발표를 못한 채 세상을 떠나, 줄곧 묻혀 있었던 노래다. 몇 해 전 나는 비 내리는 날 국수집에서 처음 그것을 들었다. 국수자락을 삼키다 말고, 멍 때리며 한참 앉아 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아마 백번은 더 들었으리라. 왜냐면, 우리 사회가 겪었던 슬픔과 한(恨)의 '밈'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 박자 빨랐던 배호의 삶을 담은 노래는,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절뚝대며 안개 속을 부유하던, 우리 역사의 르쌍티망이리라.

'고요한 안개 속에 헤매는 이 밤/깨여진 사랑에 가슴 아파서/정처 없이 걷는 이 발길/아~쓰라린 가슴 못 잊을 추억이여/고요한 안개 속에 사랑을 불러본다' 이 노래를 들으면, 참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필이면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일까? '...짓밟힌 청춘의 미련만 남아...깨여진 가슴 못 잊을 추억이여...' 2절은 이렇게 이어지나, 결국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로 속을 헤맬 뿐이다.

최근 비타500 박스 속에 넣어 전달됐다는 돈의 실체를 생각한다. 돈은 그냥 돈이 아니었다. 권력-이권 사이의 밀애를 나누던 혀였다. '색(色), 계(戒)'처럼 까발려서는 안 되는, 벗김-노출을 거부한 것이었다. 감춤-금기-은폐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짜릿한 사랑의 교신이었다. 안개 속에서만 달콤해야 할 부끄러우나 덧없는 사랑, 아니 서로 간의 믿음과 의리의 확신이었으리라. 그러나 모두 말라비틀어진, 우리 사회가 이미 잃어버린 가치의 서글픈 이마 아닌가. 군신유의·붕우유신으로 언급되던 의리·신의는 이제 조폭영화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박스에 가려진 달콤한 권력-이권, 그 밀애의 현장은 가림막이 걷히면 곧 발각되고 만다.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짓밟히고...깨어질' 것 들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교훈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달도 차면 기운다'는 노래가락 차차차(次次次)를, 우린 믿는다. 일월영측(日月盈盈)이니, 모든 것은 차차차차 진행되는 자연의 순리다. 달콤했던 순간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권력-이권의 밀애에는 반드시 그 은밀한 부위를 가리개로 가릴까? 인류가 초창기부터 생식기를 나뭇잎, 팬티 등으로 가리는 것은 실제 예의상이거나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남녀 간의 사랑으로 탄생할 2세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번식기의 나약하고 취약한, 은밀한 부위를 보호하기 위한 이기적 행위이다. 권력-이권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무릎 위 30cm의 에로티시즘을 단속질 하는 '색, 계'처럼, '권(權), 계(戒)'는 논하되 왜 '권, 불계(不戒)'에는 침묵하는가. 지식과 사유 세계에 '계'·'불계'의 왈가왈부가 있어도, 민주주의 사회에 '권·불계'는 불선하다 하겠다. 그러나 기여입학제처럼 '기여정치제' 식의 해방구역은 불가할까. 치졸한 '밤안개 속의 사랑'을 '노!'라 한다면 대명천지의 사랑, 권력·출세욕의 일탈구역을 양성화하는 것 말이다. '예기'에서는, 음력 2월 봄 기운이 왕성한 파종 시기에는 남녀가 눈이 맞아 야반 도주해도 막지 않는다(奔者不禁)고 했다. 권력-이권이 '안개 속'이 아닌 공개된 장소에서 떳떳하게 짝짝꿍 하는 것을 잠시 공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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