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해서 뜻을 바르게하고 때에 맞는 바른 삶 살도록 옛 성현들의 말씀 되새겨야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도망자'(1993)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리슨 포드는 '인디아나존스'로도 유명한 배우이지요. 시카고의 저명한 의사 리차드 킴블(해리슨 포드)은 갑작스런 불운에 직면합니다. 응급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서는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죽인 범인과 사투를 벌였지만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는 억울하게 아내 헬렌의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무엇인가 그를 둘러싸고 음모의 올가미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건 탈주를 시도합니다. '도망자'가 됩니다. 영화는 그의 탈주와 그를 잡으려는 연방 경찰 제라드(토미 리 존스) 사이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묘사합니다. 억울하게 아내 살인범으로 몰린 주인공은 진짜 범인을 잡아내지 못하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입니다. 부도덕한 의료계와 제약회사가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을 그렇게 '도망자'로 만듭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단란했던 한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유능한 한 의사를 흉악범으로 만들고, 국가와 사회를 우롱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부정한 이득만을 취하고자 했던 악한 무리들을 '도망자'는 악전고투 끝에 일망타진합니다. 전형적인 서스펜스 드릴러물입니다.

살다 보면, 해리슨 포드의 '도망자' 만큼은 아니지만, 얼추 그 비슷한 신세가 될 때가 간혹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있고, 학교에서도 있고, 직장에서도 있습니다. 구경꾼들은 가급적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가 않기 때문에 신원(伸寃)은 항상 본인의 몫입니다. 범인으로 몰려 처벌을 받기 전에 진짜 범인을 잡아야 하는데, 그 일이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런 억울한 일들은 이미 모종의 '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뒤집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늘이 돕기 전에는 사실상 불가능할 때가 많습니다. 진짜 범인은 항상 세(勢)를 업고 암약하기 때문에 쉽게 꼬리를 밟히지 않고, 설혹 꼬리가 밟혀도 이내 그 꼬리를 자르고 달아납니다. 필요하면 적당히 '꼬리'를 만들어 몸통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힘없는 자들은 늘 당합니다. 하릴 없이 '도망자'같은 영화나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최근의 뇌물 게이트를 보면서 해리슨 포드의 '도망자'를 떠올려 봅니다. 진짜 범인을 잡아야 하는 '도망자'의 처지가 너무 안쓰럽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도망자'로 살라고 했던 옛 성현들의 말씀도 다시 새겨봅니다. 주역 서른세 번째 '천산돈'(天山遯), 돈괘(遯卦)를 보면 '무엇에서든 도망치라'는 권고가 나옵니다.

구사(九四)는 좋아도 도망하니 군자는 길하고 소인은 비색하니라.

구오(九五)는 아름다운 도망이니 바르게 해서 길하니라.

상구(上九)는 살찌는 도망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肥遯无不利).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64~265쪽'

주역 돈괘는 도망해서 뜻을 바르게 하고 때에 맞게 살라는 권고입니다. 영화 '도망자'를 생각해 보고, 또 제가 겪은 그 비슷한 신세를 떠올려 보니, 과연 도망만이 최선의 처세술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망의 때를 놓치고 매달려 그리워하는 일만큼 못난 것도 없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살찌는 도망(肥遯)'만이 오직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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