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겨울 땅에서부터 만물의 따스로운 봄 시작 '투 트랙 전략' 외교 필요
독락당. 홀로 있는 고독한 시간을 즐거이 지내려는 집 아닌가. 자줏빛(紫) 구슬(玉)의 산 자옥산에서 흘러내리는, 자줏빛 시냇물 자계에 노닐던 노인 회재를 생각하며, 독락당 뒤안 계곡을 거닐다가, 문득 눈에 띈 것이 바로 '인지헌(仁智軒)'이다. 아! 저건 사랑(인)과 지혜(지) 곧 필로소피의 베란다 아니랴.철학은 희랍어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다. 필로는 '애(愛)', 소피아는 '지(智)'이니, '지혜 사랑=애지' 아닌가. 또한 '애'는 어질 '인' 자와 통하니, 애지를 '인지'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인지헌'은 보나마나 '동북(東北)' 쪽이다. 왜냐하면 '동'은 인(仁)-춘(春)-원(元)-생(生)을, 북은 지(智)-동(冬)-정(貞)-장(藏)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인의예지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인지'는 춘하추동의 '춘동', 원형이정의 '원정', 생장수장의 '생장'과 상통한다. 두 글자만으로 네 글자 한 세트의 의미를 함축하니,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안목이 있다면 '인지'라 썼지만 '지인'으로 잘 바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무슨 소린가. '동쪽=봄'에서 '북쪽=겨울'이 오는 게 아니라 반대로 '북쪽=겨울'의 언 땅, 그 깜깜하고 차디 찬 곳에서 '동쪽=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 점을 깨치면 '지(智)' 자가 그 나머지 셋 '인의예'를 다 감추고 있는 것이니, 감출 '장(藏)' 자와 단짝임 간파해낸다. '지장설'(智藏說)! 이런 독법은 거의 잊혀졌다. '지장'이란 지혜의 씨앗(밈)을 묻고 있는 어둡고 차디찬 땅의 상징이다. 그래, 북쪽은 '흑(黑)·룡(龍)'의 땅이다. 깜깜한-검은-가물가물한 곳이라서 '현(玄)' 한 글자로 축약된다. 참 '묘(妙)'한 곳이다. 인간의 서늘하고도 오묘한 두뇌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문명의 봄, 생명의 미래가 여기서 펼쳐진다. 퇴계 이황은 이 '지장설'에 선경지명을 가졌다. 이 사상은 에도시대 일본 주자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만물이 모두 봄에 시작한다고? 아니다. 착각이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땅에서부터다. 이런 '북쪽=지'의 통찰을 상실하면 따사로운 봄날을 얻기 힘들다. '차가운 빙점' 근처만 서성일 뿐이다. 이곳을 잘 풀어내야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처럼 '동쪽=인'이 순조롭게 열려온다. 지금 중국, 러시아, 북한이 '북쪽=지'이고, 미국, 일본은 '동쪽=인'인데, 우리 외교는 이 두 곳 다 막혀있다. 무엇보다 '북쪽=지'를 장악하고 '동쪽=인'을 풀어가야 하리라. 미래 지혜의 씨앗(밈)은 중국, 러시아, 북한도 잘 다루면서 미국, 일본도 함께 움직여가는 '투 트랙 전략'에 있다. 필로소피아의 베란다, 인지헌(仁智軒)이 이를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