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겨울 땅에서부터 만물의 따스로운 봄 시작 '투 트랙 전략' 외교 필요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지난 해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독락당(獨樂堂)에 들렀다. 평소 가고 싶었던, 경주 안강 옥산리에 있는 회재 이언적의 고택 사랑채다. 조선 중기의 박인로는 독락당을 찾아 회재를 사모하는 마음을 담고 주변 경관을 읊은 가사 '독락당'을 지었다. 장현광 문하의 이지백은 독락당을 호로 삼고 영천의 용산리 원각에 은거 강학하는 정자 독락당을 지었다. 뿐만아니다. 순천 선암사 등에도 독락당이 있다. 유교 전통에서는 홀로 있을 때, 나 홀로 있다는 생각을 삼가라는 뜻에서 '신독(愼獨)'을 중시하나, 우리 선현들은 유독 '독락'을 목표로 삼았다.

독락당. 홀로 있는 고독한 시간을 즐거이 지내려는 집 아닌가. 자줏빛(紫) 구슬(玉)의 산 자옥산에서 흘러내리는, 자줏빛 시냇물 자계에 노닐던 노인 회재를 생각하며, 독락당 뒤안 계곡을 거닐다가, 문득 눈에 띈 것이 바로 '인지헌(仁智軒)'이다. 아! 저건 사랑(인)과 지혜(지) 곧 필로소피의 베란다 아니랴.철학은 희랍어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다. 필로는 '애(愛)', 소피아는 '지(智)'이니, '지혜 사랑=애지' 아닌가. 또한 '애'는 어질 '인' 자와 통하니, 애지를 '인지'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인지헌'은 보나마나 '동북(東北)' 쪽이다. 왜냐하면 '동'은 인(仁)-춘(春)-원(元)-생(生)을, 북은 지(智)-동(冬)-정(貞)-장(藏)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인의예지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인지'는 춘하추동의 '춘동', 원형이정의 '원정', 생장수장의 '생장'과 상통한다. 두 글자만으로 네 글자 한 세트의 의미를 함축하니,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안목이 있다면 '인지'라 썼지만 '지인'으로 잘 바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무슨 소린가. '동쪽=봄'에서 '북쪽=겨울'이 오는 게 아니라 반대로 '북쪽=겨울'의 언 땅, 그 깜깜하고 차디 찬 곳에서 '동쪽=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 점을 깨치면 '지(智)' 자가 그 나머지 셋 '인의예'를 다 감추고 있는 것이니, 감출 '장(藏)' 자와 단짝임 간파해낸다. '지장설'(智藏說)! 이런 독법은 거의 잊혀졌다. '지장'이란 지혜의 씨앗(밈)을 묻고 있는 어둡고 차디찬 땅의 상징이다. 그래, 북쪽은 '흑(黑)·룡(龍)'의 땅이다. 깜깜한-검은-가물가물한 곳이라서 '현(玄)' 한 글자로 축약된다. 참 '묘(妙)'한 곳이다. 인간의 서늘하고도 오묘한 두뇌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문명의 봄, 생명의 미래가 여기서 펼쳐진다. 퇴계 이황은 이 '지장설'에 선경지명을 가졌다. 이 사상은 에도시대 일본 주자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만물이 모두 봄에 시작한다고? 아니다. 착각이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땅에서부터다. 이런 '북쪽=지'의 통찰을 상실하면 따사로운 봄날을 얻기 힘들다. '차가운 빙점' 근처만 서성일 뿐이다. 이곳을 잘 풀어내야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처럼 '동쪽=인'이 순조롭게 열려온다. 지금 중국, 러시아, 북한이 '북쪽=지'이고, 미국, 일본은 '동쪽=인'인데, 우리 외교는 이 두 곳 다 막혀있다. 무엇보다 '북쪽=지'를 장악하고 '동쪽=인'을 풀어가야 하리라. 미래 지혜의 씨앗(밈)은 중국, 러시아, 북한도 잘 다루면서 미국, 일본도 함께 움직여가는 '투 트랙 전략'에 있다. 필로소피아의 베란다, 인지헌(仁智軒)이 이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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