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축에 서있던 포항 급격한 산업화 속 시대정신 실종 시민 스스로 자부심 가져야

▲ 이종욱 사회부장
한국 산업의 수도 포항이 철강산업을 넘어 환동해권 물류중심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포항은 1960년대초까지만 하더라도 인구 5만명을 겨우 넘은 동해안의 조그마한 어촌마을이었다.

그런 포항이 1960년대말 '제철보국'이라는 슬로건아래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건설공사가 시작되고 1973년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됐다.

산업의 쌀인 쇳물이 생산되면서 세계적인 철강도시로 성장했고, 인구 5만에 불과했던 도시가 53만을 자랑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외지인구의 갑작스런 유입으로 포항 고유의 정신이나 전통이 사라지면서 포항을 이끌어갈 정체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글로벌 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포항'이란 이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올들어 이강덕 포항시장이 4+1전략목표중 '기초질서 지키기'를 포함시킨 것도 바로 이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기초질서란 교양있는 시민이 되기 위한 출발점이며,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스스로에게 포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포항은 동해안의 조그마한 어촌도시가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신라왕가와 직결되는 역할을 했을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 신라 2대 남해왕의 왕비인 운제부인이 영일현 사람이었고, 3대 유리왕이 신라 6부 성씨를 내릴 때 경주 정(鄭)씨의 세거지가 형산 아래에 있었다고 돼 있다.

제 8대 아달라왕대 연오랑·세오녀 부부도 신라왕가의 인물이거나 최소 지방호족이었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신광면 냉수리비와 흥해읍 중성리비는 아직 완벽한 해독을 하지는 못했지만 재산권과 토지권 등의 분쟁에 관한 내용을 판결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판결이 신라 최고의결기관인 화백회의에서 이뤄진 것이란 점에서 신라왕가와 관련된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해야 할 부분도 많겠지만 이같은 사례들은 포항이 신라 수도인 서라벌과 직결됐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고려말 충절의 상징인 포은 정몽주선생의 고향이 현재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라는 것도 큰 역사문화적 자산이다.

또한 현대로 와서는 한국 근대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새마을운동이 포항시 북구 기계면 문성리에서 시작됐다는 점, 한국 산업화의 초석을 다졌던 철강산업의 심장부였다는 점 등 고래로 부터 포항은 항상 중심점에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포항은 산업화 과정속에서 이같은 역사와 정신을 잃어버렸고, 마침내 도시를 이끌어갈 시대정신마저 잃어버렸다.

따라서 포항시는 53만 시민들에게 한국 역사의 중심축에 서있었던 포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줌으로써 교양을 갖춘 글로벌 시민정신을 심어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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