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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청시대 낙동강을가다- (9)안동 낙천

퇴계 거닐던 도산구곡 예던 길…시간으로 그려낸 한 폭의 수묵화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kjm@kyongbuk.com 등록일 2015년05월21일 21시57분  
▲ 안동대학교 앞을 흐르는 반변천 전경. 권영목 사진작가 제공
낙동강 원류가 청량산 아래로 굽이굽이 흘러 반변천과 만나는 합수(合水)의 곳인 옛 개목나루(안동호 보조댐)까지를 옛날에는 '낙천(洛川)'이라 이름 했다.

지금도 이 곳에 대한 예찬은 벽안의 서양인에게도 마찬가지. 지난 2011년 미슐랭의 관광안내 가이드북인 그린가이드 영문판 한국편에는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태백으로 넘어가는 넛재까지 이어지는 낙동강을 따라 가는 '35번 국도(Route 35)'에 별점(★) 하나를 부여했다. 국민 소설가 김주영 씨도 수 년 전 이곳을 다녀보며 청량산 부근 낙동강의 경치를 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예안 고을 땅인 낙천은 1976년 안동호로 수몰되기 전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이 즐비했다. 절경도 빼어났다. 동방의 주자로 일컬어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오가산지(吾家山誌)'에서 청량산 계곡을 따라 낙천이 흐르면서 절경을 이루는 운암, 월천, 오담, 분천, 탁영, 천사, 단사, 고산, 청량을 '도산구곡'으로 이름 지어 '무이구곡'에 비견해 읊었다.

청량산을 뒤로하고 물길 따라 내려오면 안동의 동북쪽 가송리다. 경관이 빼어나기로 유명한 곳이며,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던 길이다. 예안(현 안동 도산면)으로 낙향해 도산서당을 지은 퇴계는 자주 청량산을 찾았다. 그가 걸었던 낙동강변의 '예던길'을 신예작가 최성달과 국내 중진화가 권준이 글과 그림을 융합한 형식으로 '도산구곡길, 사람의 길을 가다(2009년 출간)'에 담아냈다.

가송리 강 건너편 바위산 품 안에 있는 16세기에 지은 정자가 산뜻하다. 정자 바로 앞에 묵은 노송 한 그루가 강으로 다가 가려는 듯 몸을 기울이고, 주변에는 봄꽃이 다소곳이 피어 있어 꽤 운치가 있다.

▲ 가송농촌체험마을 전경.
강을 따라 남하하다 보면 동편에 왕모산이 있다. 서편에는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에 2004년 개관한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독립운동 관련 사진 등 유품과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청포도', '광야' 등의 시를 생생하게 체험 할 수 있다. 이 육사의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의 14대 손. 육사는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라고 이 곳을 노래했다.

당시 안동호 터 일대 강변의 풍광이 뛰어났음은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이 말해준다. '선유'(船遊,뱃놀이)도의 일종인 이 유첩은 1763년 허주 이종악이 집안 어르신 4, 5명과 함께 이 일대 명승 12곳을 배로 둘러본 후 12폭의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안동시는 안동읍지인 '영가지'에 기록된 '견항진'(犬項津'개목나루)을 지난해 안동호 아래에 복원했다. 나룻배를 운항하고 나루터와 주막촌 야외무대 등으로 옛 모습을 살려내 관광지화하려는 것이다.

지금은 수몰됐지만 옛날 도산면 분천(汾川,부내)의 농암 이현보는 집 앞으로 흐르는 강변에서 '어부가'와 '취시가'를 지어냈다. 현재 보이는 농암종택은 원래 강 하류 도산서원에서 2㎞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분천동에 있었던 것.

육사의 집안이 대대로 살았던 원촌리 집도 사라지고 없다. 안동호 건설로 수몰된 광산김씨들의 터전도 애환을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 스무 채쯤의 고옥을 뜯어다가 지금의 오천리 산자락 아래 다시 터를 잡고 마을을 만들었다. 마을 이름도 군자리로 새로 지었다.

안동호가 들어선 곳은 수몰 전 절경도 절경이지만 1970년대 거기 산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마지막 따뜻한 공동체였을 것 같다. 지난달 안동호 수몰민의 만남의 날이 있었다. 40년 세월이 지났지만 안동호에 깊이 잠긴 고향을 마음속에 늘 그리고 사는 이들이다. 농암 이현보의 17대 종손 성원씨는 풍광 좋은 예전 분천을 잊지 못한다. 집의 마루에서 바로 낙동강에 낚싯대를 드리웠다고.

낙동강의 상류를 젓줄로 한 안동은 한국역사에서 범상치 않은 대사건이 세 가지가 있다. 후삼국 통일전쟁을 종식시키고 고려로 다시 통일되게 한 결정적인 계기인 '고창지첩(古昌之捷)', 70일간 여말의 임시수도가 된 공민왕의 몽진, 그리고 조선 성리학의 본산으로 수 많은 선비 정치인을 배출한 추로지향(鄒魯之鄕)이자 그 정신을 이어받은 의병항일투쟁의 역사이다.

우선 안동의 역사에 첫 장을 연 것은 930년 1월 안동 병산(屛山)에서 벌어진 고창(古昌, 현 안동 일대)전투. 파죽지세의 힘을 지닌 견훤(진훤)을 고창성 군사의 지원으로 꺽은 것이다. 서라벌을 점령한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대구 공산전투에서 대패한 왕건의 고려가 반전한 것. 전투가 끝나고 대첩의 소문이 크게 퍼지면서 30여 군현(郡縣)과 명주(강릉)로부터 흥례(울산)에 이르기까지 동부 연해 지방 110여 성이 차례로 고려에 붙게 되었다. 후백제는 지고 고려가 뜬 것이다.

▲ 안동읍 풍산읍 마애리에 위치한 마애선사유적지 모습.
태조 왕건의 보답이 화려했다. 동남 땅이 편안해졌다는 뜻이 담긴 '안동부(安東府)'로 개칭 승격하고 고창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창 성주(城主) 김선평(안동김씨의 시조)과 김행(안동권씨의 시조) 그리고 장길(안동장씨의 시조)을 국가 최고 명예인 태사에 봉하고 벽상공신으로 현양했다. 두 김씨는 신라 왕성이다. 이들 3인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안동을 지켰다. 3인의 묘우(廟宇, 신위를 모신 집)가 있는 곳이 안동웅부공원 뒤 태사묘(太師廟)다. 1천여 년을 이어오며 해마다 삼공신(三功臣)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한다. 차전(車戰)놀이는 이 전투를 기념하여 열리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민속놀이다.

권태사의 외손이었던 퇴계가 쓴 퇴계집 권42 '안동부 삼공신묘 증수기(安東府三功臣廟增修記)'에 "안동부 관청 담 안에 삼공신 묘우가 있고 그곳에서 고려 태조공신 세 분을 제사하는데, 김공 선평(宣平), 권공 행(幸), 장공 정필(貞弼)이 그분들이다"라고 실려 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에는 종묘가 있고 성균관에는 문묘가 있다. 이들보다 앞선 유적지인 안동에는 태사묘가 있다. 종묘 문묘는 국민적인 행사이다. 태사묘 삼공신 제향 행사도 국민적인 축제로 치러지는 날이 언젠가는 와야 할 것이다.

그런 왕씨 왕조와 필연의 역사가 이어온 것인가. 고려 말 홍건적의 침략을 당해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몽진했다. 공민왕이 썼다는 영호루 현판 등 곳곳에 그 유적이 있다. 백두대간을 넘어 예천에서 안동으로 오는 길에 낙동강의 작은 지류 송야천(추정)을 만나자 안동의 여인들이 겨울 하천에 엎드려 노국공주의 도강(渡江)을 도운 것이 '놋다리밟기'의 연원이다.

옛 안동인의 항일투쟁사는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일제가 대한 땅을 강점하자 단식으로 순국 항거한 예안 의병장 이만도, 반변천을 만나는 낙동강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안동시가지 앞을 흐르는 낙동강변을 메워 만든 둔치일대에서는 1997년부터 해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을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선정됐다. 이는 안동 풍천면 일대에 별신굿놀이 하회탈춤을 복원한 것을 계승하고 축제화한 것이다. 대표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축제 성공 사례로 새로운 먹을거리 산업이기도하다.

1998년 낙동강변 남쪽 안동시 정하동의 택지개발지구에서 두 기의 무덤이 발굴된다. 무덤 주인이 서른한 살의 나이로 병사한 고성이씨다. 그의 가슴 위에 편지 한 통과 미투리 한 켤레.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당신 모습을 자세히 보여달라"는 아내의 글이다. 500여 년 전의 일이었다. 투병한 남편의 쾌유를 빌면서 아내는 머리카락을 잘라 삼과 엮어 짚신을 만들었다. 살아있는 배우자도 헌신짝처럼 배신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대 부부들에게 많은 생각을 머금게 하지 않은가.

안동시의 앞내이자 뒷내인 낙동강 상류 강변에 우뚝한 영호루와 귀래정이 수백년 우리 역사를 지켜봤을 터. 낙동강은 안동시 풍산읍 아름다운 마애(마래) 절벽과 풍산평야를 만들었다. 그 강은 이제 신도청이 들어선 풍천 구릉지 앞에 이르러 경상북도의 신 도읍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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