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빛이 되는 석가모니의 믿음 불교·기독교, 세계 이끌 종교

▲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1973년 봄 용문사(예천)로 6학년 소풍을 갔다. 걸어서다. 꼬마들이 10리(8km)도 넘는 길이라고 수군거렸다. 봄볕 아래 땀나는 길이다. 신라 말 고승 두운(杜雲) 선사가 소백산 어머니의 안 가슴 같이 포근한 명당 터에 창건한 명찰(名刹)이다. 승려를 보자 궁금증이 발동했다. 그 시대는 교사나 목사 같은 권위자는 좀 다가가기 어려웠다. "스님 질문해도 돼요?". "왜"(해도 된다는 뜻). "부처님이 진짜 있어요?"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있고 말고"

엊그제가 석가모니 탄신을 기념하는 날이다. 서울 서대문밖 신촌에 있는 봉원사를 찾았다. 옛날 궁금증과는 좀 다르지만 역시 궁금하다. 대웅전 앞에 앉아 안부도 할 겸 알고 지내는 승려께 휴대폰을 걸었다. "스님, 부처님이 중생에게 가르치신 참뜻이 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뜻을 알고 문자를 보내왔다. "무지로부터 해방. 현실을 직시하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앎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선언한 멋진 분이예요"

42년 만에 시공을 달리한 두 승려의 말을 한 보자기에 싼 답안을 뭘까. 불교신자들이 믿는 극락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가보지 않고는 모른다. 극락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역사적 석가모니, 인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궁구(窮究)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석가모니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석가가 깨닫고 믿은 것 말이다.

석가모니가 2천500년 전 힌두교의 스승 '구루'에게 배운 뒤 히말라야의 설산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것은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을 없애고 해탈, 자유를 얻을 수 있는 8정도와 자비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설파한 진리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이 이 땅에 구현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질문명이 그 편리함을 넘어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타락하고 위기적 징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음이 경고되고 있다. 물질 그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석가모니의 믿음은 빛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진리임을 부정할 수 없다.

후고구려를 건국했다가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비명에 간 궁예는 미래의 미륵 정치와 평등사회를 만들려 했다. 이 나라 역사에 긍정을 남긴 위대한 승려도 많다. 그러나 중생의 무지를 이용해 혹세무민한 일탈한 승려들은 가짜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성계와 조선을 건국하면서 불교의 폐단을 혁파했다.

우리사회는 일제강점과 6·25전쟁을 겪으며 남과 함께 어울려 사는 대동(大同)의 이상은 빛바랜 골동품이 됐다. 외환위기 이후는 자본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무한경쟁, 공동체는 없고 개인만 있는 지옥문 앞 '난전(亂廛)사회'라 하면 너무 비관적인가.

대한민국에 선진국을 말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물질자본만 성(盛)한다면 반쪽의 성공이다. '정신의 선진국', '문화의 선진국'이 돼야 하지 않을까. 개발과 성장이라는 현대인의 욕망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정신'이 풍부한 나라가 우리의 꿈이 돼야 한다고 믿고 싶다. 믿고 믿음 주며, 예의와 도덕이 기준이 되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노적가리처럼 높게 쌓인 세상….

석가의 가르침(Budism)이 제대로 행해지는 것도 사회자본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앞으로 세계를 이끌어나갈 종교로 불교와 기독교를 꼽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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