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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청시대, 낙동강을 가다- (11) 내성천

영남의 젖줄 시작된 물줄기에 유교정신도 유유히 흘렀다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kjm@kyongbuk.com 등록일 2015년06월04일 22시04분  
▲ 명승 제19호 호명면 선몽대. 내성천과 하천 앞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함께 어우러져 한국의 전통적 산수미를 보여주는 예천 내성천 유역의 대표적 경승지로 유명하다.

내성천(乃城川)은 영주 서천과 봉화읍을 거치는 내성천 상류가 만나면서 물을 크게 불린다.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선달산(先達山·1천236m)아래 '생달샘'에서 발원해 봉화읍과 영주시, 예천군을 지나 낙동강과 합류하는 길이 109.5㎞의 맑고 깨끗한 1급 수질을 자랑하는 경북 북부지역의 젖줄. 내성천 상류인 봉화군 물야면 오전댐 소공원에는 "내성천 300리 이곳에서 시작되다"라는 표지석을 세워 내성천 발원지임을 알리고있다.

내성천은 물야면 가평리를 거쳐 봉화읍으로 흘러 내려간다. 가평리 내성천 서편 기슭에는 10여년 전부터 뜨고 있는 고택 계서당이 있다. '이도령(춘향전)'의 실존인물이라고 추정되는 성이성이 태어난 곳이었고, 성의 후손이 살고 있다.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존모델이라는 학설을 1999년에 내놓은 연세대 설성경(국문학) 명예교수에 따르면 광주목사가 된 부친을 따라 남원을 떠난 성이성은 1639년과 1647년 두 차례 암행어사로 남원에 왔다(암행록). 설 교수는 "성이성이 1차 암행어사 때 스승인 조경남을 만나 소년시절의 일을 얘기했고, 문장가인 조경남이 1640년께 춘향전을 지었다"고 주장한다. 성이성을 이도령으로, 춘향의 성씨를 성(成)으로 한 뒤 가상의 탐관 변사또를 등장시켜 춘향전을 지었다는 것.

성 섭(1718∼1788)이 지은 '교와문고(橋窩文藁)'에도 실려있다. '우리 고조께서 암행해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 수령이 큰 잔치를 베풀어 술판이 낭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어사가 걸인 행색으로 들어가 지필을 달라 하여 준중미주천인혈/반상가효만성고/촉루락시민루락/가성고처원성고(樽中美酒千人血/盤上佳肴萬姓膏/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라 적고… 이어 어사 출두가 외쳐지고…' 한글로 바꾸면 '동이의 술은 천 사람의 피요/상 위의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 소리 높더라'이다. 춘향전과는 '준중(樽中·술동이)'이 '금준(金樽·금술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도령이 꾸짖은 탐관은 양태를 달리하고 시대를 달리하여 오늘날에도 수시로 돌출해 나오니 세상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내성천에 물을 보태주는 지류로 석천변 달실(유곡리)을 빼놓을 수 없다. 영동선 철교에서 보인다. 석천을 앞에 두고 산으로 둘러싸인 '금계포란' 형국을 하고 있다는 달실마을. 달실의 '달'은 '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글맞춤법 이후 닭실마을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충재 권벌 때문.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여 어머니의 묘소가 있던 달실에서 15년간 자리잡고 살았다.

내성천으로 모이는 봉화 골짝 골짝에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는 평생 봉화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온 노부부의 일상적인 삶을 그린 것. 워낭소리의 상징물은 쟁기질이다. 토지를 갈아엎어야 작물을 심을 수 있듯이 사람이나 기업이나 정당이나 국가나 영속적으로 진보하려면 주기적인 쟁기질이 필요한 것이다.

봉화는 내성천의 발원지이고 한강수계 영월 내리천의 시발지다. 백두대간 마루의 한 부분이라는 얘기다. 세계최남단의 열목 어서식지를 보유할 정도로 청정한 산간 오지인 봉화는 사과나 송이버섯, 대추 등의 임산물, 농산물이 소득의 주를 이루고 있다. 봉화군에서 송이를 이용해 18회째 송이축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연평균 20t 생산하는 송이는 산림조합을 통해 공매되고 있다고 군청은 밝혔다.

봉화군청 박남주 과장은 "봉화는 조선시대만 해도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할 정도로 최상급의 우수한 품질을 가진 은어가 잡히던 곳이다. 지금은 은어가 봉화까지 올라오지 못하지만 은어축제를 통해 깨끗한 자연환경과 청정봉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내성천은 영주 문수면 수도리에서 삼면을 휘돌아 물도리를 만든다. 그곳에 무섬마을이 앉아있다.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 등 40여호가 산다. 선성은 예안군의 옛 이름이다. 마을 앞 내성천 쪽 모래벌 섶다리에는 내성천의 비경을 담아가려는 여행객들이 눈에 띈다.

▲ 예천군 용궁면 회룡포.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태극 모양으로 350도를 휘돌아감으며 흐르는 태극형(연화부수형) 지형으로 유명하다.

내성천 하류로 내려오면 오른편에 꽤 넓은 들판을 가진 예천읍 고평(高坪)리다. 조선의 명재상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고향이자 노후 거처지다. 그는 경사(經史)·천문·지리·병법 등 다방면에 능통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김덕령, 사명대사 등 초야에 묻힌 30여명의 인재를 천거하는 등 왜적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방책을 내놨다. 이순신이 어명을 어겨 옥에 갇혔을 때에는 유명한 상소문 '신구차 (伸救箚)'를 우의정으로서 올려 사면했다. 이순신은 훗날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라고 말한바 있다. 분조(分朝) 받은 세자를 호종(扈從)하며 평안도 등지에서 군사모집과 작전지휘, 의병장을 격려했고, 시국수습책을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머문 곳)로 보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용사일기'가 전해온다.

좌의정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고대광실을 짓고 산 여느 사대부와 달리 약포는 초가삼간을 짓고 소탈하고 청백한 삶을 살았다. 낙향 때 조정에서 많은 은전(恩典)을 내리려 했다. 모두 사양하고 내성천 관리권을 받아와 고평들을 개간해 농민들에게 농토를 나눠줬다. 그리고 자치규약인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을 만들어 지역사회를 순화시켰다. 조선판 새마을운동이라 할 수 있다.

서울 사직단에는 왕과 대신들이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 풍년을 빌어도 백성들의 소출을 늘지 않았다. 세월호사태 때 회의를 숱하게 했지만 목숨을 살리는데 속수무책이다. 4백여년 전 약포는 손수 손에 흙을 묻히며 농토를 만들어 백성의 주린 배를 채울 곡식을 창출했다. 나라에서 내린 시호 정간(貞簡)에 '청백하게 절개를 지켰으며 덕을 쌓음에 게으르지 않다'는 뜻이 담겨있다.

섬진강시인이 있듯이 내성천시인이 있다. 안도현 시인이다. 내성천과 고평들이 내려다보이는 학가산 자락 호명면 황지리 소망실에서 태어났다. 안 시인은 "내 시의 강과 관련된 거의 모든 상상력은 내성천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내성천의 은모래알이 나를 키웠다. 나는 내성천의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던 한 마리의 어린 물고기였다"고 회상한다.
▲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에서 열린 무섬외나무다리축제에서 관람객이 외나무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고 있다. 연합

호명 월포리는 내성천이 들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흘러 우리개라고 했고, 내성천이 초승달 모양으로 마을을 안고 흘러 월포(月浦)라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어느 날 미루나무가 늘어선 내성천변 모랫벌인 갱빈(강변)으로 소풍을 가 신나게 공차기를 하던 기억이 나는 곳이다.

더 하류로 내려가면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선몽대(仙夢臺)다. 선몽대 숲 앞을 흐르는 내성천과 넓게 펼쳐진 은모래 백사장은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 창건한 정자다. 월포리와 백송리는 경상북도청이 들어서는 신도시가 지척이다.

내성천은 호명면 담암리 앞에서 예천읍을 거쳐 나온 한천과 만난다. 이 내성천의 마지막 압권이 회룡포(의성포). 용궁면 향석리 비룡산에 막혀 물길을 350도 돌이켜 을(乙)자 또는 태극모양으로 두 번이나 굽이친다. 비로서 내성천은 3백리 긴 걸음을 낙동강 더 큰물에 맡긴다. 낙동강 본류와 문경의 금천을 만나는 삼강에서다.

내성천 모래벌은 남한 땅에 남은 마지막 비경이다. 대한하천학회 주관 '내성천을 세계자연유산으로'라는 세미나에서 오경섭 한국교원대 교수, 허재영 대전대 교수, 박창근 강릉 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 등 학자들은 내성천을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 등록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생태하천공학의 선구자인 독일의 한스 헬무트 베른하르트 교수는 내성천을 방문하고 첫마디가 '팬태스틱(Fantastic)!'(환상적이다 기막히다 매혹적이다)이었다고 한다. 내성천은 경상북도인들보다 타도나 이방인들이 더 사랑한다. 정작, 도민들은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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