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옳음과 다른 옳음의 존재도 인정하는 끊임없는 성찰의 자세 필요해

▲ 곽성일 사회2부장
'일본 총리 아베는 과거사를 외면한 망언을 왜 그리도 당당하게 말할까?'

인간의 조직에는 늘 '옳음'과 '옳음'의 갈등이 상존한다. 아베의 발언이 우리에겐 '망언'이지만 일본 보수사회에는 '옳음'이다.

어느 조직이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옳음'만 인정하고 다른 조직의 '옳음'을 '또다른 옳음'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서 갈등은 시작된다.

우리나라와 주변국의 이익에 심각한 불이익을 초래하는 아베의 '망언'을 망언이게 하려면 아베를 비롯한 일본 보수사회의 '옳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선행돼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옳음'이 미국의 동북아 패권에 대한 이익과 결부해 '강력한 옳음'이 돼가고 있음을 경계할 수 있다.

맹자는 조직에서는 무엇보다도 '의(義)', 즉 '옳음'이라는 가치가 절대적으로 우선시 돼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옳음'이 없으면 조직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옳음'이 없다면 조직 존재 자체가 현실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옳음'이 건전한 상식에 기초한 것인지 가혹하리만큼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나치전범이나 흉악범들 중에는 의외로 순진하리만큼 부드러운 인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라는 의문을 갖는 경우가 많다.

1960년 이스라엘은 나치전범 중에 유태인을 가스실에 보내 죽인 아이히만을 체포했다. 아이히만은 놀랍게도 자상한 남편에, 훌륭한 아버지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나치의 명을 받은 교도소장으로서 직분에 충실했으며 주어진 목적에 부합하는 행위를 했고 법을 준수한 것일 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며 죄가 없다"

독일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의 죄명을 '사유 불능성', 즉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죄'라고 붙였다.

아베는 모든 나라가 군대를 가지고 자기방어를 위해서는 어디든 침략할 수 있다는 국가가 가지는 상식만을 이야기할 뿐,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통한 주변국의 군사적 위협이나 자신들이 70여년전에 저질렀던 반인륜적 범죄라는 '사유'는 아예 하지 않는다. 인종청소를 상식으로 받아들였던 아이히만은 '평등'이나 '인간의 존엄성'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이런 상식에 따르는 많은 인간이 흉악함을 정당화하고 있어 이것을 '악의 평범화'라고 말한다

만약 아렌트가 한국에 살아있다면 이렇게 질문했을 것 같다.

"독립유공자의 자손은 생계를 걱정할 처지에 있고 친일파 청산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일제의 군위안부 문제에 화는 내지만 일본대사관 앞 집회는 참석자가 적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시대는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민족이 과연 아베 총리를 비판할 권리가 있는가 라고 말이다.

지도급 인사들이 본인이나 자식을 부당한 방법으로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고 불량무기 구입에 동조하는 등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악의 평범화'에 나서는 한 국가의 미래는 보장받지 못한다.

나라를 잃는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감정적 옳음'만으로 '이기적 옳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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