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하게 흐르는 충효의 물길따라 수많은 애국열사 배출

▲ 한천 은붕어잡이 체험행사에 참가한 가족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한천(漢川)이 흐르는 예천은 금천, 내성천, 낙동강이 감싸는 물의 도시다. 북으로는 백두대간 자락이 펼쳐있다. 산수(山水)가 교합하는 고을이다.

예천(醴泉)이 예부터 물이 좋다는 것은 지명이 말해준다. 한자로 단술 예(醴), 샘 천(泉)자를 쓴다.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노하리에 있고, 수질 좋은 감천(甘泉)온천이 있다. 고을 이름이 수주촌(水州村, 417~458년), 수주현(水酒縣, 신라 지중왕 505년)이다. 수향(水鄕) 1천 6백년이다.

굽이치는 하천이 S자로 구불구불 흐르는 사행(蛇行) 하천은 주변에 옥토의 들판을 만든다. 여기서 나는 쌀, 사과, 풋고추, 황태, 참기름, 호두, 오미자, 은풍준시를 비롯한 다양한 품종이 생산돼 모두 일등품으로 팔린다.

한천(漢川, 일명 漢水)이 생명수로 흐르며 뒤에는 흑응산이 아늑하게 안아주는 곳에 예천읍이 있다. 한천 앞에 남주작의 남산(南山)이 있다. 남산은 서울 경주 청도 등 몇 군데 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천(한수)과 함께 있는 곳은 서울 이외는 드물다. 한천의 상류 금곡천도 '북한천(北漢川)'으로 개칭하면 한천과 더 어울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예천에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은 물과 무관하지 않지만 교육도 한몫했다. 흑응산 아래 명당이라고 알려진 송대 옛터 높은 언덕에 1922년 2월 15일 중등교육기관으로 개교한 대창학원(大昌學院)은 경상북도 근현대 교육의 산실. '양양팔경(襄陽八景)'에 나오는 '송대제월(松臺霽月)' (비 개인 송대언덕 달빛에 더욱 아름답구나)의 그 송대다. 4군(郡)연합 중요물산 품평회 고문으로 상공업 발전에 앞장 선 고 김석희 초대 학원장(학교장)은 1931년 김천고보(현 김천고) 설립후원회 고문도 맡을 정도로 교육열정이 회자됐다. 보성전문 법과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보기 드문 엘리트인 고 김교용 대창의 2대 교장(1950~97년 재임)은 2011년 스승의 날 kbs안동방송국이 방송한 '김정모의 시사논평'에 교육자의 표상으로 이례적으로 소개된 인물이다.

대창학원은 대창공민학교를 거쳐 25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1948년 대창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1953년 대창고등학교로 개교됐다. 2공화국의 핵심인 현석호 국회의원 내무·국방장관, 육군 대장출신인 유학성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등 대창학원 출신들은 현대의 중심에 섰다. 5·16 쿠데타 후 박정희가 국무총리를 제안했으나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현정택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현 장관과 한 뿌리(원학골 연주현씨)다.

정용인 전 대전고법 원장, 권창륜 서예가, 이수창 생명보험협회장, 권병하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 회장, 이상연 경한코리아 사장, 야전 사단장으로 정연우(육군 7사단장)·김종해(육군 3사단장)장군, 김종창 카이스트 석좌 교수(전 금융감독원장), 김정식 연세대 상경대 교수(한국경제학회장), 권동칠 트랙스타 사장, 김주하 농협은행장 등 숱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시험에 수석 합격한 대창고 졸업생 윤 육 씨는 "3·1 만세운동 이후 세워진 민족학교가 흔적 없이 사라졌으나, 대창학원은 유구한 세월 동안 옛터에 그대로 자리하고 명문의 반열에 올랐으니, 숭고한 교육일념이 이뤄낸 쾌거다"라고 말했다.

산수가 좋은 이 곳에 옛 부터 빼어난 인물이 났다. 이 곳이 낳은 고려조 임춘, 조선조 윤상과 권문해, 대한민국 조윤제는 한국사에 있어 보배다.

12세기를 산 서하(西河) 임춘(林椿)은 '국순전' '공방전' 등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假傳體)소설을 남긴 당대 대문호였다. 청년기부터 문명(文名)을 날렸으나 1170년 '정중부의난'으로 개경을 떠나 산 넘고 물 건너 예천 서천리에 정착했다. 참 선비를 품은 안식처였다. 이인로 오세재등과 함께 고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이었으나 요절했다. 국순전을 실경 뮤지컬로 만들어 예천 문화의 브랜드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1567년 가을, 명(明)의 사신으로 온 서국(徐國)과 위시량(魏時亮)이 "동방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능히 아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묻자 퇴계 이황은 우탁,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윤상, 이언적, 서경덕 7인을 적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여선칠대가(麗鮮七大家)'라 할 만 하다. 별동(別洞) 윤상(尹祥,1373~1455)은 세종 조 대제학, 성균관 박사로 왕세자(단종)를 가르치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10여년 재임 시 많은 후학을 길러내 불교사회를 유교사회로 바꾼 조선초 대학자다. 경상도에 퇴계와 같은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이 나오게 된 토양이다. 조선시대의 문과급제자 중 예천 출신은 62명이다. 큰 고을인 경주 52명, 밀양 32명, 대구 27명 등에 비해 많다.

 

▲ 1953년 대창 중·고등학교 입학식 전경.


예천군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관아(1932년 이전에는 대심동에 위치) 옆 연못이 있는 반학정에서 공부했던 다산 정약용은 예천을 일러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했다고 한다. 인문학과 유학의 못자리란 뜻이다.

예천군은 대심동으로 군청을 이건할 계획이다. 함께 반학정을 복원하여 수(水)자와 궁(弓)자의 조형물이 있는 광장공원으로 조성하면 좋으리라. 군청사는 터는 넓어도 건물은 작고 화려하지 않게 지었으면 한다. 그게 예천의 정체성에 부합한다. 지붕도 화려한 당나라풍의 팔작지붕이 아니라 만주 고구려식의 우진각으로, 정군 757년의 유구한 군(郡) 역사와 전통을 형상화해 양쪽으로 7층, 중앙에 5층으로 오목한 요(凹)형으로 창발성 있게 지으면 어떨까 싶다. 예천군은 757년생으로 올해 정군(定郡) 1258년이다. 신라 경덕왕(757년)때 영안(풍산), 안인(동로, 산북 일부), 가유(산양), 은정(상리, 하리)의 4현을 영속시켜 예천군이 됐다.

국문학자 도남 조윤제(1904~1976). 문학사가 김윤식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도남 조윤제 탄생 100주년에 부쳐'란 한겨레신문 글 일부다. "일본, 漢詩, 서양과 다른 조선시가 특유의 근대문학이 탄생한 것이었다. 국권상실기의 가장 독창적 사상인 '신민족주의 문학사상'이다. 도남은 한국문학을 학문으로 인식한 최초의 학자이다" 국군기무사령관 조현천 중장이 한 마을에서 태어난 도남의 집안(함안조씨)으로 손자뻘이다.

명심보감에 수록된 임 즐과 도시복은 한국 효자의 영원한 본보기다. 군은 상리면 한천 상류 용두리에 도시복 생가를 단장했다. 예천이 내세워 온 충효의 고장이 빈말이 아니다.

임춘 임즐은 예천 임씨, 윤상은 예천 윤씨, 권문해는 예천 권씨. 빛나는 예천의 대 토성들이다. 예천권씨는 조선의 권맹손 권오복에 이어 현대에도 권영자 권두영 등 중앙에서 두드러진 인물이 많아 차회에서 다룰 것이다.

 

▲ 한천고향의강에 설치된 분수대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한천은 이 나라 민권운동에 공헌한 인물의 정기가 서려있다. 척왜(斥倭), 안민(安民)의 반외세 반봉건을 내건 동학군 지도자 전기항과 대구 10월항쟁 지도자 윤장혁이 그들.

1894년 전규선 등 동학도 11명이 관군에게 잡혀 한천에 생매장 됐고, 일본군 정탐병이 현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의 농민군을 살해하는 등 아비규환이었다. 당시 예천 소야리(현 문경시 산북면)에 본부를 둔 경상도 북부 동학농민군 가담자는 48개 접소에 7만여 명에 달한 것으로 관아는 파악했다. 최맹순이 주역이고, 자본을 대는 모량도감 전기항이 조역이다. '갑오척사록'(정양수 역)에 전도야지가 기록돼있다. "경북지역 동학농민군과 충주에서 급파된 일본군 공병대와 예천 유생 양반이 조직한 민보군(民堡軍) 연합군 간의 한천(漢川)의 서정들 전투는 당시 농민군이 전국을 통틀어 일본군과 벌인 첫 전투다"(신영우 한국사연구회 회장 겸 충북대 사학 교수).

한천은 상리면 고항리 백두대간 묘적봉에서 발원하여 내성천과 합류하는 유로연장 35㎞다. 1998년 상리면 은계초등 고항분교에 예천군곤충연구소를 설립하고, 85만여명이 참관한 2013 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를 개최했다. 한천 중류에 '금당 맛질 반서울'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맛질이라는 마을이 있다. 권재진 전 법무장관이 태어난 맛질에는 안동권씨가 대성이다. 주손이 권기선 부산경찰청장. 이곳에 하화탈춤놀이와 같은 '맛질별신굿'이 전해오다 명맥이 끊겼다. 기자가 복원 아이디어를 20년 전 쯤 내놓은바 있다.

예천은 산업화 이전에는 작지 않은 도시였다. 개화시대 일제강점기 전후 예천에는 청요리(중국음식)가 발달할 정도. 경상도는 물론 충북 강원도까지 청요리와 식재료를 공급한 곳. 고품질이 요구되는 예천에 와서 중국음식점을 차리면 문 닫기 쉽다. 예천에 외지인이 중국집이 안 된다는 말의 유래다. 대구시 인구가 81만이던 1965년 16만6천명이던 예천은 이후 산업화 시절 미개발지로 남았다. 공업화된 도시에 비해 자산가치가 상대적으로 폭락했다.

예천은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경북도청을 유치하면서 재도약기를 맞고 있다. 군은 257천㎡ 규모의 제2농공단지에 이어 제3식음료특화 농공단지를 조성중이다. 인류의 새로운 먹을거리로 부상할 곤충산업 육성, 대규모 양궁대회 유치 등 다양한 계획을 하고 있다.

예천은 한국을 대표하는 활의 고장으로 상무(尙武)정신이 깃들어있다. 남산에는 국궁을 쏘는 무학정이 있고, 청복리 국제양궁장도 있다. 한국 국궁(國弓)의 절반을 생산한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권영학 '궁장(弓匠·활)'과 1979년 한국 양궁으로 세계를 제패한 김진호 한국체대 교수도 활의 인물.

예천의 '예(醴)'를 풀어보면 닭 유(酉), 굽을 곡(曲), 콩 두(豆)의 삼합이다. 닭이 구부려 콩을 먹는 형상이 그려진다. 평화와 풍요의 땅이다. 닭은 신라와 프랑스의 국조(國鳥)다. 김알지 박혁거세 등 신라 건국세력은 닭을 숭상했으며 발상지인 계림(鷄林)이 국호이기도 했다.

"예천사람들은 물속 30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도남은 "'은근'은 한국의 미(美)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라 했다. 이 끈기는 경상도사람 특히 예천인의 기질과 딱 맞는 말이다. 문무(文武)를 갈고 닦아 충효를 실천하는 예천인들은 학문 교육을 꽃피우고,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꿈을 꾸고 있다.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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