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신도청시대, 낙동강을 가다- (13)삼강에서 퇴강까지

풍류 안주 삼아 막걸리 한사발…황홀한 풍광에 세월도 잠시 쉬어가네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kjm@kyongbuk.com 등록일 2015년07월02일 21시46분  
▲ 낙동강 700리가 시작되는 곳으로 유명한 퇴강 전경.
문경 영순과 예천 풍양에 걸터앉아 있던 옛 삼강나루. 대표적인 삼산삼수(三山三水)지역이다. 이 지역은 예천 풍양면 삼강리, 용궁면 향석리,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일대지만 요즈음 삼강으로 알려져 있다.

삼산(三山)은 '동국여지승람'에 "한 지맥은 대구 팔공산, 문경 주흘산, 안동 학가산에서 다한다"는 문헌처럼 세 군데 산이다. 학가산과 주흘산(문경새재), 팔공산지맥이 삼강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삼수(三水)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하풍진(河豊津, 삼강의 옛 이름)은 그 근원이 셋이다. 금천, 내성천, 태백산 황지에서 나와(낙동강) 삼강에서 합친다"고 했다.

낙동강이 규모면에서 강다운 강이 되는 곳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커지기에 여러 군데를 말할 수 있다. 삼강도 그 중에 하나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낙동강 본류와 그와 버금가는 내성천, 그리고 문경에서 내려오는 금천이 만나는 삼수합처이다.

옛 삼강나루는 낙동강이 1934년 갑술년 7월 대홍수로 강변 곳곳이 큰 수해를 입으면서 그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삼강나루도 이때 수마가 할키고 가 3채의 주막이 떠내려가고 19세기 말에 지은 유옥연 할머니의 주막만 남았다고 한다. 이 주막이 언론에 보도돼 널리 알려지면서 당시 90세이던 유할머니는 2005년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여전까지 주모 노릇을 했다. 2008년 복원공사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삼강나루는 1934년 이전까지 보부상과 사공들의 숙소가 있었다. 과거를 보러 가는 길손도 있었고, 소금상, 세곡(稅穀·조세로 바치는 곡물)을 운반하던 아전, 보부상까지 삼강을 거쳤다. 1980년대 중반까지 마지막 배와 사공(유영하)이 있었다. 삼강나루 하류에 다리가 생기며 나룻배를 찾는 길손이 눈에 띄게 줄자 배가 멈췄다. 풍광 좋은 이곳에 2004년 강을 가로지르는 삼강교가 완공돼 눈에 거슬린다. 무개념 개발의 전형이다. 천하의 서예가 권창륜이 쓴 '삼강절경'이란 표지석이 무색할 지경이다. 

비단내란 뜻의 금천(錦川)은 전국 제일가는 오미자 산지로 각광받는 문경시 동로면에서 발원한다. 금천에 대해 고윤환 문경시장은 보존과 개발의 두 가치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고 시장은 "자연환경에 인문과 역사환경을 보태어 강안에 산재하는 정자, 구곡문화 등 새로운 하천문화 개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없어진 삼강의 서쪽 나루터(문경시 영순면 달지리)를 복원하면 어떨까 싶다.

금천이 낳은 현대 인물로는 고 채문식 전 국회의장이다. 금천변은 인천채씨의 집성촌이다. 채문식(蔡汶植, 1925~2010)은 관료와 언론인(민국일보 동경특파원)을 거쳐 정계에 투신해 8대~13대까지 6선 의원을 지낸 거물급 정치인이다. 해방정국에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이철승씨 등과 함께 반탁 시위를 주도한 한국 학생운동의 1세대다. 고등고시(행정)를 합격한 그는 해방직후인 1949년 20대 문경군수 시절 문경군청을 문경읍에서 점촌시(현 문경시)로 옮긴 결단의 주인공으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제3, 4공화국 시절 신민당을 거쳐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주도한 5공화국에 참여해 민주정의당 대표와 국회의장을 지냈다.

백제가 마한 54국 연맹체가운데 마지막 남은 원산성(용궁면 향석리 비룡산)을 점령하고 삼국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정양수 향토사학자의 조사). 전략적 요충지인 원산성과 삼강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신라, 고구려, 백제가 200년 동안 뺏고 빼앗기는 정복전투를 벌였다. 동국통감(삼국기)에 따르면 190년 백제(초고왕)는 신라 서쪽 국경 원산향(圓山鄕)을 공격하고 부곡성(缶谷城·군위부계)을 포위하여 신라 기병(騎兵) 5백을 무찔렀다. 고구려 장수왕의 대를 이은 문자왕도 원산성을 공격했고,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원산성을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다 아차성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마한시대에 축성된 원산성(圓山城:또는 따뷔성, 또아리성)은 둘레가 약 920m, 높이가 1.5~3m인 토석 혼축 산성이다. '군지'에는 '비룡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원산성'이라고 표기돼 있다.

비룡산(飛龍山)은 높이 240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주변이 내성천 낙동강을 둘러싸여있는 천연요새다. 육지 속의 섬인 회룡포(回龍浦)를 감싸고 있는 산이다. 1997년 복원한 봉수대는 예전에 동쪽의 서암산 봉수, 서쪽의 소이산 봉수, 북쪽의 가불산 봉수와 연락을 담당하는 군사요충지였다고 한다.

비룡산 중턱에 신라 때 창건한 장안사가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금강산과 양산, 비룡산에 하나씩 모두 3개의 장안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임춘과 함께 문명을 떨친 이규보가 머무르며 지은 시 '장안사에서' 가 전망대 팔각정에 걸려있다.

장안사에 머무르며 산에 이르니 번뇌가 쉬어지는구나, 하물며 고승 지도림을 만났음이랴.
긴 칼 차고 멀리 나갈 때는 나그네의 마음이더니, 한 잔 차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맑게 갠 절 북쪽에는 시내의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지는 성 서쪽 대나무 숲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동산 소나무와 국화는 꿈속에서 잦아드네


장안사에서 산을 오르면 1998년에 세운 정자인 전망대(회룡대)가 있다. 주변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휘감아 돌아 모래사장을 만든 곳에 자리한 회룡포(구 의성포)의 절경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회룡포는 국토해양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마을 1위로 선정되었고, 여행작가 1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95명이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회룡포를 꼽았다고 한다. 이 마을의 원래이름은 의성포다. 의성에서 온 경주김씨들이 개척했다고 한다. 예천군에서 옆 마을 이름이었던 회룡포로 고쳤다.

일제가 한만(한국 만주) 통치를 위해 부산에서 서울 신의주를 거쳐 장춘까지 철로를 놓았다. 경성역에서 부산역까지가 경부선. 한국 교통역사상 혁명이었다. 경부선이 생기기 전에 교통의 대동맥은 한강과 낙동강이다. 낙동강변에 주요 도시가 형성된다. 그래서 일제 이전에 안동 상주 문경 예천은 지금의 시세와 비교할 바가 아닐 정도로 컸다. 이제 이 지역은 탈공업화 시대를 맞아 새로운 변화가 예상된다. 문경시의 경우 2011년 7만5천664명이든 인구가 2014년 7만6천470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새로운 부흥의 조짐이 아닐까.

낙동강은 삼강에서 남류하여 문경 새재(구명 문경현 초점)에서 나온 조령천과 문경I.C 부근 마성면 신현리에서 합수하여 문경 함창 들판을 적시며 흐르는 영강과 만난다. 이어 영순면 말응리와 상주 사벌면 퇴강리에 도달한다. 퇴강리에는 낙동강 700리 시발비가 서 있다. 낙동강 700리가 시작된다는 곳이다. '낙동강칠백리'는 노랫가락의 단골소재였다.

퇴강리 언덕에는 퇴강 천주교회(물미공소)가 고색창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1924년에 건축된 고딕식 붉은 벽돌조 건축물로 수십여명의 신부를 배출하고 기독교 초기 역사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십자형 건물의 고딕식 건축양식을 잘 간직해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선정됐다. 1903년 김천본당 물미공소로 설정됐다. 이 성당 신사제관은 1957년 준공된 것. 고 김영옥 신부(대구대교구)를 비롯해 11명의 성직자와 15명의 수도자를 배출하는 등 경북 카톨릭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삼강에서 퇴강까지 대략 10여㎞거리다. 낙동강은 퇴강진나루에서 문경의 영강을 받으며 몸집을 불리고 경천대(사벌면삼덕리)로 장중(莊重)히 흐른다.
<ⓒ 경북일보 & kyongbuk.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