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는 명당 중의 명당

▲ 양동주 대구한의대 대학원 겸임교수

금당실은 마을 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600여년전 15세기 초 감천 문씨(문헌)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처향인 금당실에 터전을 잡으면서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 흔히 이런 곳을 우리는 승지라고 일컫는다. 즉 이런 경치가 좋거나 지형이 뛰어난 곳, 10군데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중 한 곳이 금당실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의 하나로 병화가 들지 못한다'고 하여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정감록(鄭鑑錄)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다.

마을 앞 금곡천에 사금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금당실'은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 한다. 또한 감천 문씨가 이곳을 개척했고 사위인 박종인과 변응영이 정착하여 지형을 보니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을 하고 있으며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매봉이 조산(組山)이 되고 그 뒤로 길게 뻗은 소백산 줄기가 내룡(來龍)이 되어 연못을 상징해서 금당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군지에 따르면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달구리재(학명현)'가 앞에 있고 '개우리재(견곡현)'가 오른쪽에 있으니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하여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 금당실 마을 전경.
금당실 마을은 조선시대 고가옥과 미로로 연결되어 있는 돌담길이 양반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전통마을로서 역사, 문화, 전통이 강한 곳이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하여 재향 올리는 추원재,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터,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 이외에도 개량된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어 전통생활양식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연못에 떠있는 연꽃을 상징하는 오미봉 공원과 마을의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막아주고(裨補風水) 마을을 보호해주는 금당실 송림은 금당실 사람들은 예부터 소나무를 베는 사람을 우물에 빠뜨릴 정도로 소나무를 아끼고 소중하게 보호하여 왔다.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도 금당실 마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쑤'라고 불리는 이곳은 내륙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소나무 방풍림이다. 예전에는 그 길이가 2km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800m 정도만이 남아있는데, 방풍림이 이렇게 줄어든 것은 금당리 마을에 숨겨진 슬픈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892년 마을 뒷산인 오미봉에서 몰래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 두 사람을 마을 주민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러시아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어 마을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말았다. 마을주민들은 고심 끝에 마을의 공동재산이었던 이 소나무를 베어 러시아 측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을 충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베어내고 남은 것이 지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로부터 마을을 지켜준 송림에 대한 마을주민들의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 금당실 내 돌담장길.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금당실 마을(예천군 용문면)로 이어지는 산맥(龍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지세의 척추역할을 하는 백두대간에서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 되는 산이 태백산(1,567m)이며 이곳에서 청옥산(1,277m)을 내어주면서 크게 용이 꿈틀거리듯 산세가 변화하는데 청옥산은 남으로 뻗어나가 낙동정맥의 본산이 되며 백두대간은 남서쪽으로 그 맥을 이어가는데 옥석산(1,242m)에서 서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용이 고개를 크게 처들 듯 선달산(1,236m)을 만들고 서쪽으로 뻗어가다가 마대산(1,052m)를 내어 용맥은 다시 남서쪽으로 진행한다.

백두대간 용맥은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 가는 듯 하며 형제봉(1,178m)을 만들고 진행하면서 소백산(1,439m)에 이르러 크게 일어나 성봉을 하였다. 소백산에서 흰봉산(1,261m)으로 이어지는 용맥은 남으로 뻗어있는데 지금의 중앙고속도로와 영주와 단양으로 이어지는 철도 그리고 국도5호선이 연결된 재를 내어주고 흰봉산에서 문복대(1,074m)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다시 도약하기 위하여 움츠리는 모습으로 크게 서쪽으로 감아 진행하여 황장산(1,077m)을 성봉하였다. 문복대에서 남으로 가지맥을 내어 용맥의 높이를 낮추면서 진행하여 성봉된 산이 금당실마을의 조산(祖山)이 되는 매봉(865.3m)이다. 매봉은 용문사의 주산이 되는데 용문사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윤장대가 남아 있으며 용문사는 870년 신라 경문왕 때 두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용문사를 오른쪽으로 두고 용맥은 숫한 변화를 거듭하여 순한 산세와 풍수지리적 지세를 갖춘 용맥으로 진행하여 금당실 마을 뒤에 이르러 표고300m에서 남으로 뚝 떨어지면서 좌우로 가지맥을 내어 호종보호사(護從保護砂)을 만들고 그 중심맥은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게 낮게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모든 살기(殺氣)를 다 털어내고 다시 성봉하여 만들어진 산이 금당실 마을의 주산(主山)되는 오미봉(200m)을 형성하였다.

금당실 마을의 주산인 오미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맥들이 금당실 마을을 포함한 용문면 중심으로 기운을 모아주는 국세(局勢)를 하고 있으며 마을을 형성하는 내명당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있는 외명당이 같이 있는 살기 좋은 양기(陽氣)터라 할 수 있다. 또한 외침으로부터 침범을 당하지 않은 곳으로 알려진 대는 풍수지리학적으로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금당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맥, 특히 문복대에서 뻗어 내려온 청룡맥이 지금의 금곡리 율곡리 제곡리로 이어지고 다시 용문면을 동에서 서쪽으로 감싸는 형국으로 용맥은 성현리와 옹산리, 덕신리와 성평리, 수심리와 광전리, 중평리와 고림리를 배산으로 하여 용문면 앞쪽 즉, 안산대(案山帶)를 형성하고 있어서 문경 예천 영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다.

따라서 금당실을 중심으로 한 용문면은 외침으로부터 쉽게 노출되지 않은 천하요지인 명당인 것이다. 예로부터 예천의 예(禮)의 고장이요. 충절의 고장이며 학풍의 고장이기에 조선중기 대학자인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하였고 묘 또한 이곳이 있으며, 곳곳에 그의 유서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탁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천문, 지리, 군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뛰어난 장수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1597년 3월에 이순신이 옥중에서 죽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했다. 저서로 ‘약포집’, ‘용만문견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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