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인 DNA는 “충절·애국·영일만신화·새마을정신”

포항은 구석기문화대부터 영일만을 끼고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현재 남아있는 역사유물에서도 신라건국시기부터 왕경 경주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역사만큼이나 깊은 포항사람들의 숨결은 우리 역사의 곳곳으로 면면히 이어져 고려말 충신 정몽주와 한국전쟁 당시 이름없는 학도병으로 충절을 지키는가 하면 산업화의 중심에 서서 국가발전을 이끌어 왔다.

그중에서도 고려말 충신 문충공 포은 정몽주의 충절, 한국 산업발전의 초석이 됐던 포스코 창설 우향우정신, 한국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였던 새마을 정신은 포항이 갖고 있는 최고의 정신적 자산이다.

본지는 그런 측면에서 '1편 신라 건국의 한 축을 이뤘었던 포항, 변방이 아니었다.'에 이어 시대를 이끌었던 포항의 정신들을 돌아봤다.

▲ 1337년 포항시 오천읍 문충리에서 태어난 포은 정몽주 선생.
△ 문충공 포은 정몽주의 충절

정몽주는 형양공 정습명의 후손으로 고려조 과거제인 3장(초장·중장·종장)에서 모두 장원급제하며 일찌감치 그 영민함을 드러냈다.

특히 고려말 문하부 시중과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는 등 최고위 문신이었지만 여진족과 왜구토벌에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외교관으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당시 유학 경서였던 '주자집전'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앞세워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정립, 구체적인 실천운동을 제시함으로써 고려에 이은 조선왕조의 정치적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몽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던 이성계파의 회유를 물리치고 쓰러져 가던 고려왕조를 지키려 노력했다.

이방원은 그런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를 보냈지만 정몽주는 '백골이 진토되더라도 님향한 일편단심 변치않을 것'이라는 '단심가'로 굳은 절개를 보여줬다.

결국 정몽주를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한 이방원은 부하들을 시켜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시켰다.

이방원은 비록 정몽주를 피살했지만 그의 절개와 충절을 높이 사 왕위에 오른 뒤 영의정에 제수하는 한편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이어 보위에 오른 세종은 정몽주의 고향마을을 문충리로 고쳐부르게 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정몽주의 고향마을은 그의 시호를 딴 문충리로 불리고 있음에도 현재 그가 포항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은 오천읍내 도로명인 정몽주로, 올해 개관하는 포은중앙도서관, 오천읍에서 열리는 포은문화제가 고작이다.

반면 출생지로 알려진 영천시는 경북도의 지원을 받아 임고서원일대를 성역화함으로서 포항의 문화적·시대적 정신자산을 고스란히 잃어버린 셈이 됐다.

▲ 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소 용광로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오자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당시 포항제철사장)과 임직원들이 만세를 부르며 감격에 젖었다. 포스코 제공
△ 한국 현대산업화 신화의 출발 '우향우 정신'


포스코는 지난해 포항제철소에서만 1천620만t, 광양제철소와 합쳐 3천760만t의 쇠를 생산하면서 단일제철소 기준 세계 2위 제철소를 갖춘 글로벌 철강기업으로 자리를 굳건히 했다.

지난 1960년대초 박정희 대통령이 제철소 건설계획을 세웠을 당시 막대한 건설비용 마련은 물론 일관제철소 건설기술조차없는 무모한 도전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만이 제대로된 자원하나없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 막중한 임무를 고 박태준 포스코명예회장에게 맡겼다.

박대통령은 당시 영일만 건설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임자, 우리가 지금 이 모래 허허벌판에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임자의 강단을 믿네. 함 해보세"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임무를 부여받은 박태준 명예회장은 "선조들의 피값으로 짓는 것이다. 제철소 건설에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가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실패할 경우 우리 모두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라는 비장한 각오로 공사에 임했다.

하지만 자금도, 기술도 없이 영일만 모래밭에 선 그들의 앞에는 그야말로 역경밖에 없었지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영일만을 바라보며 죽을 각오로 건설작업에 나섰다.

그리고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항제철소 용광로에서 검붉은 첫 쇳물이 쏟아져 내리자 박태준 명예회장과 직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만세'를 부르며 감격의 눈물도 쏟아냈다.

1960년대말 누구도 믿지 않았던,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했던 포항제철소를 세우지 못했더라면 21세기 세계 10대 경제대국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다같이 영일만에 빠져죽자던 '우향우 정신'이야 말로 한국 현대산업화의 생명정신이었고, 그 생명정신을 담은 포스코는 한국 산업의 심장이 됐다.

▲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새마을가꾸기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문성리를 방문했다.
△ 5천년 잠자던 한국을 깨운 새마을정신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불과 5년만에 3년여에 걸친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었던 한국의 모습은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밖에 되지 않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일제강점기동안 수탈속에서 근근히 남아있던 공업기반마저 3년여의 전쟁과정에서 초토화돼 버려 국민 대부분이 풀뿌리를 캐먹어야 할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정신부터 바뀌어야한다는 취지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1971년 9월 17일 대구에서 열린 전국 시·도지사, 시장·군수에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시 북구 기계면 문성리를 찾았다.

문성리마을은 1967년 홍선표 이장(2015년 작고) 등이 주축이 돼 주민들을 설득한 끝에 기계천 지하수 개발과 양수장 설치로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으로 바꾼 데 이어 마을안길 및 농로고치기 등 '좀 더 잘살기 운동'을 성공시켜온 마을이었다.

문성리를 돌아본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이 잘살고 부흥되려면 스스로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즉 자조·자립·협동정신-요즘 나는 이를 '새마을정신'이라 부른다"며 "전국의 시장·군수는 문성리 부락과 같이 지도하고 실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현재 경북 청도군과 포항시가 서로 새마을운동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하늘만 쳐다보며 가난을 원망하던 국민들의 가슴에 '잘 살 수 있다'는 정신혁명을 불러일으킨 새마을운동의 롤모델이 포항시 북구 기계면 문성리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같은 지시와 현장을 둘러본 전국의 시장·군수들은 '스스로 잘살아보자'는 국민의식개혁운동으로 승화시켰고, 불과 40여년만에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훌쩍넘는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결국 포항은 국가변혁기 자신의 영화가 보장된 유혹을 물리치고 충절을 지켰던 문충공 포은 정몽주의 고향이었고, 5천년 민족의 염원을 풀어낸 산업현대화의 심장이기도 했으며, 잘사는 경제대국을 이끌어낸 국민의식개혁의 중심지인 셈이다.
이종욱 기자
이종욱 기자 ljw714@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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