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 균형속에 수준 있는 '융평'의 실천을 보여주는 태평성대의 세상 됐으면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태양이 발하는 빛의 정성은 씨알(實)을 만든다. 태양은 자신을 불태워서 이 세상 모든 열매들을 익힌다. 과일 한 알 한 알 속에 태양은 화학변화로 자신을 각인해 둔다. 색깔과 모양과 맛으로 그 위대한 흔적을 남긴다. 알갱이를 원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 알알이 가서 박혀, 그것을 그들의 영혼이 되도록 한다.

작열하는 태양에 달아오르는 만물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사물들은 차츰 온기를 버린다. 그 많던 열은 내리고, 서늘해지며, 차분해진다. 남쪽이 아니라 이제 서쪽이 주인이 되는 시기이다. 이때 곡식과 과실들은 수처작주(隨處作主)한다. 제각각 자기 자리에서 주인공이 된다. 알맹이를 뺀 나머지, 이파리 같은 것은 여분이다. 초목들은 그것부터 먼저 바닥에다 내 버린다. 남은 것은 각기 깜냥대로 익은 주인공들이다.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달려온 시간들이다. 시간이 끌어다 준 각각의 생명은 모두 바퀴처럼 둥글둥글 익는다. 가을은 균평(均平)-평균(平均)을 원하지 않는다. 가을이 남긴 유서(遺書), 발자국, 그림자인 세상의 모든 알맹이와 알갱이들은 깜냥대로 익어서 높아진다. 이것은 상향으로 조정되는 균형이란 뜻에서 '융평(隆平)'이라 부르고 싶다.

평균-균평이란 여러 사물의 질이나 양 따위를 통일적으로 고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융평은 단순한 형평이 아닌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면서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깜냥 껏 각기 최대한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근대 이후 우리 사회는 교육도 경제도 균평-평균을 지향해왔다. 균평-평균은 무언가를 전체적으로 낮추는 경우에 주로 사용한다. 그래서 남이 자신의 위치보다 더 높거나 성장·발전하면 그러지 못하게 발목을 잡아 당기고, 바짓가랑이를 쥐고 끌어 내린다. 이처럼 균평-평균의 정신은 전체를 하향 평준화하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평균이라도 해라'는 말처럼 평균도 못하는 경우에는 위로 올리긴 하지만, 대부분은 단순히 형평을 맞추는데만 주력한다. 따라서 전체가 낮은 수준의 성과를 보일 때에는 전체적으로 평균이 낮아진다. 모두 한층 낮은 단계로 균형을 이루도록 서로 끌어 내리는 분위기가 만연한 우리 사회. '융평'이란 말은 다시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

'융평'이란 말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시대 유학자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내건 개혁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道學) 정치의 실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패하였고, 그는 불혹이 되기 전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물론 조광조는 근본주의자-원리주의자에 가깝다고 평가할 점도 있다.

이 뜨거운 여름, 나는 이윽고 들이닥칠 가을날을 상상한다. 조광조의 융평에 기초한 도학 정치처럼 이번 가을은 정말 신바람 났으면 좋겠다. 떨어뜨릴 이파리는 다 떨쳐 버리고 될 만한 것들은 제각각 수준급 이상으로 키워내는 정치. 될 수 있는 한 다 되도록 끝까지 몰고 가서 자신을 키워 보여주는 씨와 알의 교육. 세상이 모두 융평의 실천을 보여주는 전시회의 한복판이었으면 한다. 우리들이 거기 서 있다는 생각만 해도 참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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