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규 한동대 교수·문학박사 증조부 김필락 삶·제문 정리

아직도 우리나라의 광복에 대해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는, 우리가 해방된 것은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켰기 때문이라면서, 우리 독립이 미국의 은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한다고 우리가 독립되는 것은 아니었다. 1910년, 한반도가 일제에 강탈된 후 그에 맞선 우리 선열들은 치열한 독립투쟁으로 한반도, 한민족이 결코 일본의 것이 아님을 웅변했다.

김윤규 한동대 교수(문학박사)가 최근 '조국광복에 산화한 선비들-순국선열 김필락, 그 아들 김병덕'을 펴냈다.

1919년 3·1 독립만세를 선도했다가 일제에 의해 총살된 증조부의 삶과 추모의 제문을 증손자인 김 교수가 정리해서 낸 책이다.

김 교수의 증조부 김필락(金珌洛)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때 경북도 안동에서 길안시위를 주동하고 지휘했다가 일제 경찰의 총에 맞아 순국했다. 그의 아들 김병덕(金秉悳)은 아버지의 순국 이후에도 일제에 의해 고문을 받았고 끝내 협조하지 않았다가 28세로 별세했다.

김필락에 대해서는 광복된 이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표창을 거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묘소를 대전 현충원으로 옮겨 모셨다.

김필락의 소상과 대상에 드려진 제문은 29편이 남아 있는데 모두 당시 선비들이 순국한 동지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절절히 제사지낸 글이다. 김병덕을 드려진 제문은 없고, 그 부인에게 드린 제문이 10편 있다. 원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는 증거가 있지만, 이후의 환란과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흩어지고 남은 것이 모두 39편이었다. 지금까지 보관해오는 과정에서도 난관이 많았다.

현대에 오면서, 이들 제문이 모두 한문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난관었다. 순한문으로 이뤄진 제문은 이제 후손들도 읽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조상의 위대한 순국사실을 알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제문들을 모두 번역해 출판, 후대에 남기기로 했다. 김 교수는 아들과 조카들을 모두 불러 오래된 한지로 남아 있는 제문을 모두 입력하고 번역하고 교정하고 디자인하게 했다.

이 책은 독립을 위해 산화한 선비 양대의 사적을 이해하고 그분들께 감사하는 후손의 사모를 표현한 책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남현정 기자
남현정 기자 nhj@kyongbuk.com

사회 2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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