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 사라지고 만다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한 때 나는 이미자의 '지평선은 말이 없다'는 노래에 끌렸다. 더 고백하자면 '지평선은 말이 없다. 대답이 없다'는 가사에 붙들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구절을 곱씹는 동안 나는 아득한 지평선 위에서, '과연 나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나는 깨닫고 나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 입을 뗀 적이 없다(不說一字)"는 석가모니의 고백처럼, 나를 허탕치게 만든 한 구절. 한 대 심하게 두들겨 맞고 멍해지듯, 지평선의 침묵에, 대지의 무언에 수시로 넋을 잃는다. 이것은 육중한 흙더미, 느슨한 초목들의 배치, 아득한 거리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것들은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생겨나는 것인가. 사라지는 것인가. 릴케의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 제일 첫 머리를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 말테가 대도시에 동경을 품고서 파리에 와 느낀 점은 이랬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대도시로 몰려드는데 죽으러 오는 것 같다고. 지평선을 품은 대지 위에서 내가 느끼는 것도 그랬다. 모든 것은 대지서 나와 다시 대지로 돌아간다면 대지는 그저 만물들을 춤추게 하는 무대이거나, 그들이 그저 머물다 가는 터미널일 뿐. 대지는 아무 것도 거머쥐지 못한 채, 만물들만 신나 야단법석일 뿐. 연비어약(鳶飛魚躍)! 창공에 솔개는 날고, 푸른 못에 고기는 뛰지만, 깜냥대로 날고 뛰는 저들에게 대지는 털 끝 하나 대지 못한다. 간·쓸개 다 빼어줄 듯 수많은 것들을 다 들춰내다가 다시 집어삼키는 듯, 멋진 동산 같으면서도 거대한 무덤인 듯, 대지는 이렇게도 역겹다.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는 말한다. '아직 인간의 대지는 충분히 씨앗을 뿌릴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이 대지는 야위고 메마르게 되어 더 큰 나무는 대지에서 한 그루도 자랄 수 없게 될 것이다' 다 기르는 것 같으나 다 떨쳐버리는 대지. 나는 다시 상념에 잠기고 만다. 드러내면서 감추는 그런 애매한 형식, 그것은 누구의 편인가. 산 자의 편인가 죽은 자의 편인가. 모든 것은 대지의 흙으로 돌아간다 하나, 흙은 그저 생멸(生滅)의 터미널, 허접한 무주공터일 뿐이다. 이것저것 다 거기로 돌아가는 것 같으나 착시일 뿐. 미안하다. 그곳은 애당초 집도 고향도 아니다. 무의미한 곳이다.

이쯤에 서서 나는 나의 학문을 생각한다. 그 덧없는 산 자들의 버릇을. 과연 학문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막스 웨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 에서 반문한다. 도대체 누가 아직도 학문을 '행복에의 길'이라 믿고 있는가. 인간이 학문으로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 아니 행복해질 수도 없다. 그는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한다. "학문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학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우리는 윤리적-당위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어떤 답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학문이 그렇게 줄기차게 추구하는 '알아야 할 가치'라는 것 또한, 그는 증명될 수 없다고 본다. 아, 물어봤자 '학문은 말이 없다. 대답이 없다!' 이렇게 무의미하기에, 무언가 있는가 싶어 또 수시로 그곳을 노크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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